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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무수한 고통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쁘고 환한 얼굴, 초긍정 낙관주의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5월 4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말을 갈아탄 바오로 사도를 향한 유다인들의 증오와 분노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열성 유다교 신자요 촉망받던 미래 지도자감 청년 바오로였기에 유다인들이 느꼈던 상실감과 배신감은 대단했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 입장에서 배반자요 매국노인 바오로 사도를 절대로 그냥 놔두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개종은 수많은 다른 유다인들의 개종으로 이어졌기에, 어떻게서든 신속히 그를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향한 극에 달한 유다인들의 반감과 적개심이 오늘 첫번째 독서에 잘 소개되고 있는데, 참으로 끔찍한 광경입니다.

“그 무렵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사도행전 14장 19절)

몰려온 군중은 스테파노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바오로 사도에게 큼지막한 돌들을 인정사정없이 투척했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날아오는 돌세례에 바오로 사도는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유다인들은 바오로 사도가 죽은 줄 알고 쾌재를 부르면서 그를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습니다. 다들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듯 속시원해 했습니다.

다행히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워낙 정신력과 의지가 강한 분이라 치명적인 돌팔매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되찾았습니다. 비틀비틀 겨우 일어선 그는 피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거의 죽었다 되살아난 상태에서 바오로 사도가 받은 정신적 충격이나 트라우마가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복음 선포 여정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제가 바오로 사도 같았으면 우선 응급실로 갔을 것입니다. 여기저기 상처난 부위 치료도 받고, 뇌파 검사도 받고, 진단서도 끊고, 고소장도 접수하고, 충분히 회복될 때 까지 몇달이고 휴양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상처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데르베로, 데르베에서 리스트라로, 리스트라에서 이코니온으로, 이코니온에서 안티오키아로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끔찍한 고통과 박해 속에도 바오로 사도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했고 의연했습니다. 언제나 제자들을 격려하고 고무(鼓舞)시켰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행전 14장 22절)

주님의 복음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겪은 고통은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실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끔찍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겪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신자들에게 소개하곤 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 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코린토 2서 11장 23~27절)

그 무수한 고통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쁘고 환한 얼굴, 초긍정 낙관주의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