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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님께 항복합시다! 그분 손길에 우리 존재 전체를 내어 맡겨 드립시다!

4월 30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작은 바람 한 줄기에도 흔들리는 갈대처럼, 끝도 없는 방황을 거듭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참으로 큰 위로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복음 14장 1~2절)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의지할 곳은 영원한 보루이신 주님이십니다.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참 평화, 잠깐의 평화가 아닌 영원한 평화를 주실 분은 홀로 주님뿐이십니다.

우리의 내면이 주님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열렬한 기도를 통해 그분과의 지속적인 통교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지옥과도 같은 현실 앞에서도 잔잔한 호수 같은 내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이 있습니다. 세상만사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입니다. 회심한 재소자 형제들의 삶을 통해서 느끼는 바입니다만, 감방과 수도원은 마음먹기 차이입니다.

감방 안에 하루 온 종일 갇혀 있다할지라도 마음이 자유로우면, 그래서 감사와 찬미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수도원입니다. 거룩한 분위기의 수도원 담 안에서 생활한다할지라도 마음이 꼭 닫혀있으면 그곳이 곧 감방입니다.

우리네 인생은 대체로 다 그런가 봅니다. 어느 정도 쓸쓸하고, 어느 정도 허전하고, 어느 정도 외롭고, 고달프고…누구나 다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공허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 누구든 가슴에 구멍 숭숭 뚫리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중요합니다. 엄청난 양의 술로도 채워보지만 잠시 뿐입니다. 이런 저런 취미활동이나 세상의 좋은 것으로 다 채워 봐도 허사입니다. 결국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홀로 서야 됩니다. 그분 앞에 철저한 심연의 고독도 느껴봐야 합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역시 내면 깊숙한 곳에는 다양한 근심걱정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곳에 정주(定住)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생활에서 오는 불안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요하게 그물망을 좁혀오는 바리사이들의 존재도 큰 위협이었습니다. 과연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좋은 선택이었는가 하는 의문도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내면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근본적으로 인간은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성경에서도 인간을 끊임없이 방랑하는 존재,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헤매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마르틴 하이데거 역시 인간에 대해 ‘본질적으로 근심하는 존재’로 정의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근심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야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습니다.

인간 본성상 어쩔 수 없이 안고 살아가게 되는 근심 걱정, 그 앞에서 결국 해답은 마음 크게 먹은 일이더군요. 대범해지는 것입니다. 관대하게 마음먹는 일입니다. 최종적으로 주님께 항복하는 일입니다. 그분 손길에 우리 존재 전체를 내어맡기는 일입니다.

자신의 실존을 위한 염려에만 얽매이지 말고, 인간의 실존을 가능하게 했고, 인간을 잘 알고 계시며 인간을 위해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믿음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작업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결국 끊임없는 근심걱정, 갖은 고민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은 그간 집중되었던 우리의 시선을 나 자신에게서 이웃에게로,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로 돌리는 일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잔잔한 호수처럼 완벽한 평화, 그 어떤 풍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평화. 결국 그런 평화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데서 출발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온전히 봉헌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