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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사람!

4월 12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겨우내 화분에 갇혀 지내던 수선화들을 성모상 옆으로 옮겨 심었습니다. 때맞춰 단비까지 흠뻑 내리니, 친구들도 숨통이 좀 트이는지 환한 미소를 짓는 듯 합니다. 수선화들을 옮겨심으면서 존경하는 정호승 시인의 불멸의 명시, ‘수선화에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울려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는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수선화 친구들을 성모상 옆으로 옮겨심고 나니 튤립 친구들과 어울려 한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습니다. 대자연의 신비와 위대함 앞에 입을 다물수 없었습니다. ‘몇 송이 노란 수선화가 이리도 큰 기쁨을 선사하는데, 나는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있는가? 미소를 머금게 하는가?’ 하는 생각에 급 부끄러움이 다가왔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장기화로 인해 다들 힘겨워하는 이 시대, 서로가 서로에게 한 송이 어여쁜 수선화 같은 존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사람…

아무나 그런 사람이 될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복음 3장 7절)

우리가 위로부터 태어날때, 신앙 안에서,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날때, 얻을 수 있는 은총과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은 얼굴 색깔부터 다릅니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이 벌써 다릅니다. 지극히 호의적이고 따뜻합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이 있으니,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느님 나라를 누리고 살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어떤 면에서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은 평생 소원을 성취한 사람들이니 더 이상 이 세상에 여한이 없습니다.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너와 나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내것을 내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관대하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소유한 바를 아낌없이 나눕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행전 4장 32~34절)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