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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십자가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십자가는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2월 3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갑작스레 다가온 시련의 높은 파도에 힘겨워하는 오늘 우리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의 한 마디를 던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십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히브리서 12장 7~11절)

시련의 강도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다면, 신학자 클로델의 말씀을 묵상해보도록 추천해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치워버리려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설명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분은 당신 사랑의 현존으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고통을 제거하지는 않으셨지만, 고통을 겪는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우리 삶에서 눈물을 없애지는 않으셨지만,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심을 기억해야 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유형의 고통이 모두 획일적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겪는 다양한 고통의 원인을 찾아 나가다보면, 의외로 우리 인간 측의 과오나 악습으로 인한 고통, 즉 예방 가능한 고통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운전을 난폭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난폭 운전은 노력하면 충분히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남의 말 절대 듣지 않습니다. 과속은 기본이고 불법 유턴은 특기입니다. 동승한 사람들이 깜짝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정도입니다.

그러다 대형 사고를 저질렀습니다. 겨우 목숨만 건지는 중상을 입고 투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목숨 건진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며,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말 입에 달고 살아도 부족할터인데, 한다는 말!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우리가 겪는 많은 고통은 인간 측의 과욕이나 나쁜 습성으로 인한 것입니다. 불을 보듯이 뻔히 예상되는 고통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어떤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아무런 잘못도 안했는데, 난데없이, 갑자기, 이유 없이 다가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십자가, 신비의 십자가입니다. 신앙으로 하느님 안에서 견디는 것이 상책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고통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불필요한 고통을 양산할 뿐입니다. 고통, 그 자체가 주는 괴로움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고통이 뜻하는 의미, 해결방안, 기능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십자가 앞에 설 때 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보내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그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히 노력하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묵시 3,19-20).

십자가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십자가는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강도 높은 애정표현입니다.

“여러분이 겪는 시련은 모두 인간이 감당해낼 수 있는 시련들입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1 고린 10, 12-13).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