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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 수도자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명백한 표지입니다!

2월 2일[주님 봉헌 축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케냐 방문 기간 동안 이루어진 성직자·수도자들과 만남 때의 말씀이 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축성생활의 날을 맞이하는 저희 수도자들이 반드시 마음에 새길 말씀입니다.

“우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한 사제, 한 수사, 한 수녀에게서 눈물이 마를 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불충실 때문에 우십시오. 세상의 고통 때문에 우십시오. 내쳐지는 사람들 때문에 우십시오. 버려진 노인들, 살해된 아이들을 위해 우십시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우십시오.”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기도를 멈추면 여러분의 영혼은 메말라집니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 지루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졸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주님 앞에서 주무십시오. 그것도 기도하는 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주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버리지 마십시오. 축성 생활을 하는 사람이 기도를 버리면, 영혼이 메말라집니다. 바싹 말라 시듭니다. 흉한 모습을 한 마른 나무 가지처럼, 기도하지 않는 사제나 수도자들은 흉한 영혼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생활의 날을 맞아 스스로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수도생활, 과연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의 수도생활에 대해 나는/세상 사람들은/주님께서는 정녕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수도자들의 현존에 대해 정녕 가치와 의미를 찾고 있는가? 수도자들은 존재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우리 수도자들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반대 증거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라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 사는 모습을 보고 ‘저게 뭐야? 수도자가 저래도 되는거야?’라며 충격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4~50년전, 한해 입회자가 4~50명씩 되던, 그래서 침실이 부족하던 수도 성소의 호황기 시절을 그리워며,‘라떼는 말이야!’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끼리만 알콩달콩, 오손도손, 재미있고 편안하게 살면서, 수도원 담 너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잘 짜여진 일과표에 따라 수도 규칙에 대한 철저한 준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고통받고 있는 세상과 가난한 이웃을 향한 개방과 환대, 나눔과 헌신은 조금도 안중에 없는 것은 아닌지?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닌지?

참으로 큰 도전 앞에 서 있는 축성생활이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수도생활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찾고 회복시키기 위한 진지한 숙고와 성찰은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도자들 한분 한분의 내면에 성령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열정과 활기가 넘치는 수도 공동체 생활이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수도자들의 얼굴에서 기쁨과 매력이 철철 흘러넘쳤으면 좋겠습니다.

고통받는 세상 속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수도자들의 적극적인 봉사와 헌신도 아주 중요합니다. 각 수도회 고유의 카리스마적 현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삶입니다.

어쩌면 한 수도자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명백한 표지입니다. 수도자 한분의 현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가운데 살아 숨쉬고 계신다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