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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느님 나라는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위로가 한도 끝도 없이 흘러넘치는 곳이 아닐까요?

1월 29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작년 봄 수도원 성당 옆, 손바닥만한 텃밭에다가 몇 가지 채소 씨앗을 뿌릴 때였습니다. 어떤 씨앗은 너무나 작아서 손에 제대로 쥘 수도 없었습니다. 어떤 씨앗은 너무나 가벼워서 후 불면 날아가 찾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솔직히 씨앗들을 땅에 파묻으면서도 반신반의했습니다. 이렇게 작고 볼품없는 씨앗들인데, 여기서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웬걸, 일주일이 가고, 이주일이 가고, 봄비가 한번 오고, 밭에 나가보니 기적 같은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저기서 무수한 새싹들이 고개를 쳐들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작고 하찮아보였던 씨앗 하나가 점점 자라나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을 만듭니다. 솎아먹고, 옮겨 심고, 따먹고 또 따먹고, 그래도 또 나오고… 바로 이 맛에 농부들께서는 농사를 계속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씨앗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코 복음 4장 30~31절)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대체 어떤 곳일까? 과연 나란 존재도 거기 갈수 있을까? 어떤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까? 거기서는 하루 온종일 뭘할까?

은혜롭게도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장막에 가려져 있던 신비스런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예수님 존재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열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어쩌면 예수님 그분과 함께 하는 이 세상, 그분의 손길이 닿은 이 세상이 곧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은 바로 하느님 자비의 풍성함, 하느님 사랑의 풍성함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는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위로가 한도 끝도 없이 흘러넘치는 곳이 아닐까요?

따뜻한 봄볕이 꽁꽁 얼어붙어있던 대지를 소리 없이 녹이듯이 그 숱한 우리의 죄악과 부족함, 실수와 과오들이 크신 하느님 자비 앞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그런 곳이 아닐까요?

참혹하리만치 견디기 힘들었던 우리들의 고통이나 좌절, 분노, 끝도 없는 방황… 이 모든 괴로움들이 크신 그분의 위로 앞에 자취 없이 사라지는, 그래서 부드러운 그분의 손길만이 우리 영혼을 어루만지는 사랑으로 충만한 곳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러한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조금씩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능하다면 이승에서부터 최대한 만끽해야 되지 않을까요? 언젠가 또 다른 세상에서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려야만 하는 하느님 나라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가 풍요로운 하느님의 자비 안에 살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와 닿는 현실이 아무리 팍팍하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