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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1월25일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맞아 온 몸으로 절절이 느끼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형제들, 그리고 저 자신을 바라보며, 특별히 더 많이 느끼는 바입니다. ‘변화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구나!’하는 깨달음입니다.

엄청 부족해보이거나 너무 모진 형제들, 특히 저 자신을 바라보며 기도 중에 하느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 저 형제 좀 보십시오. 기가 막힙니다. 저토록 문제 투성이입니다. 게으르고 영양가 없이 살고 있는데, 모질기까지 하니 참 걱정입니다. 저 형제의 미래가 걱정입니다. 하느님, 저 형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제게 하느님께서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을 주시더군요. “야야야야! 그 형제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 해라!”

복음서에도 비슷한 대목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셔야 하는 수난의 때가 착착 다가오던 어느 순간, 수제자 베드로 사도가 경쟁자이자 애제자이던 요한 사도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복음 21장 21절)

베드로 사도의 그런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기가 차지도 않았던 예수님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복음 21장 22절)

베드로 사도는 낄데 끼고 빠질 때 빠지는 것, 다시 말해서 ‘낄끼빠빠’에 많이 서툴렀습니다. 자주 끼지 말아야 할 때 끼어들어 예수님으로부터 호된 꾸중을 듣곤 했습니다. 경쟁자 요한 사도에 대해서는 어련히 예수님께서 알아서 하실 텐데, 어느새 다가와서 슬그머니 끼어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역시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이웃들의 결점을 바라보느라 너무 바쁜 우리들입니다. 형제들의 약점 찾기에 혈안이 된 우리들입니다. 결국 허탈함만 남는 ‘뒷담화’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어조로 말씀하고 계십니다.“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 모든 것들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리고 너는 그저 나를 따라라.”

기도도 별로, 일도 별로면서 식사 때는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해지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애써 절제하며 밥 한공기씩만 먹는데, 그 형제는 언제나 두 공기씩 흡입했습니다.

그의 무절제가 너무나 안타까웠던 다른 한 형제, 늘 절제하느라 깡마른 수사가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하느님, 저 형제 좀 보십시오! 베짱이도 저런 베짱이가 없습니다. 일은 송곳처럼 하는데 밥은 나발처럼 먹습니다. 저 형제에게 과연 구원이란 것이 가당이나 하겠습니까?”

역시 하느님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답을 주셨습니다. “애야!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보거라. 사실 그 형제는 원래 매끼니 네 공기를 먹어야 하는 친구란다. 그런데 지금 엄청 노력하고 노력해서 두 공기로 줄였단다. 나름 최선을 다해 절제하고 있는 중이란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맞아 한 가지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참 어려운 일이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해보이는 회심이요 변화이지만, 하느님 자비와 은총 안에서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믿어야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변화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인식해야겠습니다.

이웃의 회심이나 변화를 기대한다면 잔소리나 일장훈시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솔선수범, 묵묵한 희생과 실천만이 정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