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칼럼

환자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바리사이들은 정신과 마음이 오그라들었습니다!

1월20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셨지만, 동시에 철저하게도 한 인간 존재로 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똑같이 느끼셨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셨습니다.

때로 감탄하셨고, 분노하셨으며, 슬퍼하셨고, 기뻐하셨습니다.
허기를 느끼셨고, 잠을 주무셨고, 여행에 지쳐 주저앉기도 하셨습니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셨고, 수난이 다가오자 근심에 휩싸이기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이 오늘따라 어두웠습니다.
잔뜩 노기를 띠고 계셨고, 동시에 크게 슬퍼하셨습니다.

분노와 슬픔의 이유는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떼처럼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바리사이들의 악행과 완고함 때문이었습니다.

회당에 앉아 있던 다른 모든 백성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경청하였고, 크게 감동을 받았으며,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새 삶을 결심했습니다.
치유하시는 예수님를 주님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치유 활동, 오랜 세월 고통 당했던 사람이 온전해지는 일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언제 실언을 하는지? 언제 율법을 어기는지?
고발거리를 한건 건지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유난히 돋보이는 대목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코 복음 3장 4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길길이 뛸까봐 당신 말씀의 수위를 적절히 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일을 해도 되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아무리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우물에 빠진 사람이나 가축을 구하는 것은 예외적으로 용인하고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파악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 수 앞을 내다보는 말씀 앞에 바리사이들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다른 치유 장소에서 예수님께서는 환자들의 환부를 만진다든지, 입김을 불어넣는다든지, 일으켜 세운다든지 손을 사용하시며 치유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말씀으로만 치유하십니다.
손대는 것 조차 노동이라 억지를 부릴지 모르니, 말씀으로만 치유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고통받고 있는 한 인간 존재를 치유하시기 위해 사악한 바리사이들의 심기를 봐가면서 일을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기 낮춤이요 극진한 사랑인가요?

환자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바리사이들은 정신과 마음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환자의 오그라든 손은 성하여졌지만 바리사이들의 오그라든 마음은 낫지 않았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화도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