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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든 것을 간직하시는 성모님

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젊은 시절부터 남편과 결혼생활이 무척 ‘팍팍’했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팍팍’한 정도를 넘어 할머니 젊은 시절은 온통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신혼 초부터 바깥으로만 맴돌던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년에 몇 번씩 얼굴을 비치더니 급기야 소식조차 알 길이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는 끝이었습니다.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행방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생과부가 된 부인은 일찍부터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자식 교육도, 늙으신 시부모님 봉양도 혼자 몫이었습니다. 다행히 선천적으로 생활력이 강했던 부인은 그 오랜 고난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왔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자식들은 잘 성장했고, 경제적 기반도 어느 정도 마련하게 됐습니다. 장성한 자식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잡게 됐고, 한평생 홀로 갖은 고생을 다해온 어머니께 극진한 효심을 표했습니다.

평생 고생한 끝에 할머니는 이제야 겨우 여유있고 편안한 노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세상 떴으려니 생각했던 남편이 나타난 것입니다.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 건장한 체격, 준수한 용모는 어디가고 늙고 병든 할아버지, 볼품없고 꾸부정한 할아버지가 대문 앞에 서성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느냐’며 문전박대했습니다. 그러나 착한 심성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계속 문 밖에 떨고 서있는 할아버지를 일단 안으로 모셨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천천히 할아버지는 다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할머니였습니다. 일단 불쌍해서 받아들였지만 아직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해 너무 괴로웠습니다. 용서하자고 수천번 다짐해도 얼굴만 보면 혈압이 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습니다. ‘이러다 내가 죽지’하면서 마음을 바꿔먹어도 그 때뿐이었습니다.

너무 괴로웠던 할머니는 친구 할머니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습니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친구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렵겠지만 영감님이 집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늙고 병든 예수님, 추위에 떨고 있는 배고픈 아기 예수님이 찾아오셨다고 생각해봐요!”

그 한 마디 말씀이 할머니 가슴에 전광석화같이 파고들었습니다. 그 보석같은 한 말씀에 크게 깨달음을 얻은 할머니는 그날로 ‘할아버지=아기 예수님’ 등식을 만들어가기 위해 무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답니다.

늙고 병들어서야 찾아온 할아버지를 예수님으로 받아들이고자 각고의 노력을 다하시는 할머니 모습에서 온몸으로 주님을 받아들인 산골 소녀 마리아의 향기를 느낍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예수 잉태라는 청천벽력 같은 제안과 이후 계속된 가슴 철렁 내려앉는 ‘별의 별’ 상황 앞에서 오직 “예!”라고 순명할 줄밖에 몰랐던 마리아, 지극히 단순하고 겸손했던 마리아가 하느님 어머니가 되시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마리아는 전 생애를 통해 예수님을 자신 안에 깊이 간직하셨습니다. 아기 예수 잉태 이후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던 이해하지 못할 일들, 아들 예수로 인해 속끓이던 일들,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일들 앞에서 마리아는 철저하게 간직하십니다.
침묵 가운데 지속적 묵상에 전념하십니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을 때부터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 시신을 품에 안던 순간까지 성모님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하나는 아들 예수를 바라보며 묵상하는 일이었습니다.

한평생 침묵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하느님 뜻을 찾아갑니다. 그 결과 성모님은 가장 탁월한 신앙인이 되셨고 마침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올 한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입니다. 난데없는 고통과 십자가들,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 의혹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겠지요. 그 순간 성모님 일생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카 2,18)

지금은 비록 무엇이 진정한 하느님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혼란스럽지만 하느님 계획과 자비를 굳게 믿으며 굳건히 우리 길을 걸어가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주신 가장 큰 은총의 선물인 이 한 해,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고통 속에서도 활짝 웃는 한 해, 십자가 앞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은총의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