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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성탄이 아무리 수백·수천 번 되풀이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12월 23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에 담긴 의미, 특히 성탄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고고 또 묵상해야겠습니다.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우리에게 건네는 짧막한 예화 하나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하느님 육화강생의 신비, 예수님 성탄의 신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금슬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내가 큰 사고를 당해 한쪽 눈을 잃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해도 왜 계속 그렇게 슬퍼하오?”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여보, 내가 슬퍼하는 것은 눈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당신이 나를
덜 사랑할 것 같기 때문이랍니다.”

그러자 남편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잠시 외출을 나간 남편이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모습을 본 아내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눈 하나를 뽑아버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나도 당신과 같이 되었소. 나도 이제 외눈이라오.”>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애틋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예화입니다.

성탄이 아무리 수백·수천 번 반복된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나란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성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탄에 아무리 되풀이 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하고도 장엄한 드라마인 아기 예수님의 성탄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조연들로 엘리사벳, 그리고 즈카르야가 있습니다.

아들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천사의 메시지에 즈카르야는 살짝 의혹을 품었습니다.
그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지요. 즈카르야는 10달 동안이나 말 한 마디 못하는 언어장애자로 살았습니다.

즈카르야는 심연의 침묵 속에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베풀어주셨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고목(枯木)과도 같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였지만 크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새싹을 틔워내게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당하고 부족한 자신들을 당신의 인류 구원사업의 중요한 도구로 선택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즈카르야의 입을 열어주시자 마자 그의 입에서는 봇물 터지듯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즈카르야는 운 좋게도 ‘침묵의 10개월’을 통해 그토록 고대했던 ‘구원’을 온 몸으로 맛보았습니다.

강렬하고도 짜릿한 구원체험이 즈카르야의 내면 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은혜롭게도 이미 낡은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암흑에서 빛으로 건너오는 파스카 체험을 맛 본 것입니다.

그 행복한 체험으로 인해 즈카르야 삶의 태도는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어두웠던 그의 낯빛은 기쁨과 설렘의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의 세월은 희망의 나날로 변화되었습니다.
우울하고 어두웠던 그의 일상은 화사한 봄날로 탈바꿈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체험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즈카르야가 맛본 구원 체험입니다.
파스카 체험입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를 위해 선물로 주시는 보편적인 구원을 개인화하는 작업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오늘 이 자리에서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