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칼럼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힘을 포기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12월19일

엘리사벳의 외침을 통해 평생에 걸쳐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두 노인이 겪었던 고통과 수모가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복음 1장 25절)

사실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의롭고 흠없는 사람들, 성덕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였고, 엘리사벳 역시 첫 대사제인 아론의 후손이었습니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사제는 사제의 딸과 결혼해야 했었기에, 사제 즈카르야는 사제 가문의 딸 엘리사벳과 혼인한 것입니다. 또한 유다인들에게 있어 사제직은 친자식에게만 이양되었습니다.

따라서 즈카르야의 아들 세례자 요한 역시 일찌감치 하느님께 봉헌된 거룩한 사제로 점지되어 있었습니다.
즈카르야라는 이름이 지닌 뜻은 ‘하느님께서 기억해주셨다.’입니다.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이 지닌 뜻은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입니다.

이름에 걸맞게 두 사람은 거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도 올곧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 충실했으며 하느님의 뜻에 절대 순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두 사람에게 꽤나 큰 시련을 겪게 하십니다. 예상과는 달리 두 사람에게 늘그막이 되도록 자녀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이 호호백발이 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놀랍게도 노부부가 세상 뜰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황혼기에야 겨우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후의 응답이었고, 너무 늦은 감이 드는 응답이었지만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응답에 기쁨과 감격에 찬 어조로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아무리 목이 빠지게 기다려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앞에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하느님을 크게 원망했습니다. 섭섭함도 많았습니다. “저희가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하는 억하심정도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하느님께 충실했습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성전에서 충실하게 봉사했습니다. 항상 기도 안에 살았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항구한 신앙, 충직한 종의 모습에 마침내 하느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힘을 포기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도 인간의 능력을 내려놓을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녕 하느님을 만나고 진하게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그냥’ 모든 것을 맡겨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주도하시는 흐름에, 그분의 물결에 그냥 내 존재 전체를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체험의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하느님은 내 힘이 다한 곳에서 체험됩니다. 하느님은 내 존재의 비참한 곳까지 내려가 외롭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체험되는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며 완전히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풀이 죽을 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곳에서 비로소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