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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한다면 늘 그와 함께 하고 싶을 것입니다. 결국 그가 되고 싶을 것입니다!

[12월17일]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 가문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하느님께서 참으로 인간 세상 안으로 육화강생하셨음을 증명해보이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과 한배를 타기 전에 하던 일이 세리였습니다.

세리들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은 정확성과 치밀함입니다. 그들이 하루 온 종일 한 일은 금전출납부를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런 전문성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치밀하게 적고 있습니다. 예비자 때나 초보 신자 시절, 많은 분들이 체험하시는 일입니다. ‘두꺼운 구약성경보다는 신약성경부터 먼저 통독해야지!’ 하는 마음에 마태오 복음 1장 1절을 탁 펴는 순간,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구절이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낯선 이름들만 잔뜩 나열됩니다. ‘누가 누구를 낳았고’란 말마디만 무미건조하게 반복됩니다. ‘별 것도 아니구먼!’ 하면서, 단 한 페이지도 읽기 전에 성서를 내려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무미건조한 듯 보이는 이 족보야말로 무궁무진한 보물이 담겨있는 보고(寶庫)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이 족보에는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역사, 우리와 똑 같은 모습의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자취가 묘사되고 있기에 중요합니다.

우리가 장황하게 나열되는 예수님의 족보를 접하고 식상해한 반면, 성인(聖人)들은 오히려 크나큰 위로와 기쁨, 환희를 접했다고 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께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대하면서 그간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하느님, 늘 구름 속에 숨어계시는 듯 했던 하느님, 애매모호했던 하느님께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심을 느끼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같은 경우 예수님의 족보를 대하면서 우리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셨던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시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다고 감격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족보를 대하면서 우리와 친구가 되기 위해 자신의 키를 낮추신 겸손의 하느님, 우리와 똑같이 온 몸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철저하게도 ‘한 인간’인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다고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생각과 계획을 우리의 좁은 안목으로서는 쉽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냥 편하게 하느님으로 계셨으면 골치아픈 일도 겪지 않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굳이 복잡하고 소란스런 인간 세상, 때로 고통과 상처투성이뿐인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굳이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한다면 그와 늘 함께 하고 싶겠지요. 더 나아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소유가 되고 싶을 것입니다. 그와 일심동체가 되고 싶을 것입니다. 결국 그가 되고 싶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만물은 제 색깔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 세상은 반짝반짝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없는 이 세상은 상상도 못하겠지요. 그가 없는 이 세상은 짙은 회색으로, 부연 황토색으로 변할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와의 완벽한 일치, 완벽한 동화, 완벽한 하나됨을 추구합니다. 우리 인간을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당신의 모든 조건을 버리시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십니다. 우리와 완벽하게 하나 되십니다. 철저하게도 육화강생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성과 인성의 교환입니다. 정말 이해가지 않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하느님의 자기 낮춤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