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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경청(傾聽)은 두 귀 뿐만이 아니라 두 눈과 마음, 정신과 존재 전체로 듣는 것입니다!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살다 보면 가끔씩 이런 사람 만납니다. 별의 별 노력을 다 해도 호응도가 전혀 없는 사람, 생쑈를 해도 팔짱 딱 끼고 눈 딱 감고 있는 사람,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 이런 분들이 지니고 있는 두드러진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만의 세상에 깊이 빠져있습니다. 당연히 경청 능력이 조금도 없습니다.

자신만 생각하기에 이웃을 돌아볼 여유도 없습니다. 동료 인간이 겪고 있는 큰 불행과 환난 앞에서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하느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건네지는 하느님의 초대 앞에서도 무반응입니다. 경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가 매섭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오 복음 11장 17절)

경청하고 호응한다는 것, 얼마나 큰 미덕이요, 아름다운 덕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는 환대와 경청, 공감과 지지의 달인이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수도회 창립자이자 최고 장상으로 하루 일정이 잘 나가는 연예인 저리가라였습니다. 분단위로 쪼개서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그런 바쁜 가운데서도 아이들을 위해서는 늘 사무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아이들이 찾아오면 환한 얼굴로, 따뜻한 미소로 환대했고, 아이들이 편안하게 이야기하도록 분위기를 이끌었습니다. 아이들은 절친한 친구 대하듯 아무런 부담없이 편안하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돈보스코는 때로 무례한 아이들의 말이나 행동 앞에서도 그리 언짢아하지 않았습니다.

돈보스코가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정말 놀라운 사실 하나는 누구에게나 그 태도가 한결같았다는 것입니다. 토리노 시장이나 대주교님이 방문할 때나 한 뒷골목 아이가 찾아올 때나 똑같은 환대를 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찾아와도 대주교님에게 하듯이 자신은 작고 옹색한 의자에 앉으면서 그들에게 안락의자에 앉으라고 권하였고, 그리 중요해보이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인듯 최대한 집중해서 그들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이것이 돈보스코가 성인이 된 비결이었습니다. 모든 인간, 생명이 붙어 있는 그 어떤 존재든, 한 인간 존재에 대한 존중과 배려, 경청과 환대, 이것이 그분 성화의 비결이었습니다.

경청한다는 것은 그저 듣기만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상대방의 기쁨과 희망, 고통과 좌절에 대해 주의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예술이 경청입니다. 듣는 데 그치지 않고 한 존재에 대해 귀를 기울이는 것이 경청입니다. 그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경청입니다.

따지고 보니 경청은 일종의 예술입니다. 우리는 경청의 기술을 연마해야 합니다. 경청은 그냥 듣는 것 이상의 일입니다. 경청은 한 존재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입니다. 경청은 한 존재에 대한 전인적 개방을 전제로 합니다. 경청은 두 귀 뿐만이 아니라 두 눈과 마음, 정신과 존재 전체로 듣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