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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자료 , 평생양성자료

그는 “돈 보스코와 목소리만 다르고 나머지는 똑같다.”는 평을 받았다.

복자 필립보 리날디 사제(기념일: 125)

필리보 리날디는 1856년 5월 28일, 루 몬페라토(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돈 보스코를 알았으나,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살레시오 회원이 되라는 초대를 받아들이고 돈 보스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소 여정에서 어머니의 기도와 돈 보스코의 인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돈 보스코가 만난 아이들』 197쪽)

사제품을 받은 후(1882년) 사제직을 지망하는 늦은 성소자들의 양성 책임이 그에게 맡겨졌다. 1889년부터 12년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원장, 관구장으로서 활동했다. 1901년에 돈 루아는 부총장 겸 총경리로 그를 임명했다. 업무는 과중했지만, 그 일들이 직무 자격 취득과 영적 지도자로서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매우 독창적이고 새로운 단체, 돈보스코여자재속회(VDB)를 창립하여 살레시오 가족 전반에 걸쳐 풍요와 자극을 주었다.

총장에 선출(1922년)된 후 형제회원들의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돈 보스코에 대한 공경의 발전에 힘썼다. 특히 돈 보스코의 내면적인 삶, 하느님과 일치하고 사명에 헌신한 점, 도움이신 마리아께 드린 한없는 신뢰 등을 강조했다. 그는 창립자의 독특한 해설자로서 예언적 직감력으로 ‘시대의 징표’를 포착하고 그에 맞추어 대담하게 돈 보스코의 정신을 현재화했다. 그는 “돈 보스코와 목소리만 다르고 나머지는 똑같다.”는 평을 받았다.

1931년 12월 5일에 토리노에서 선종했다. 돈 보스코의 살레시오회 제23차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인 1990년 4월 29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리날디 신부의 부성애

“어느날 리날디 신부가 맡고 있는 이들 가운데 농사일을 하던 나이든 한 청년이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저는 훌륭한 강론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대단한 사제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젊은이의 잠재력을 알고 있던 리날디 신부는 그에게 온화하게 말해 주었다.

‘요한, 중앙 제대의 초들을 본 적이 있는가?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지. 하지만 모두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 그곳에 놓여 있지. 사제가 동트기 전에 미사를 올릴 때, 긴 초들은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거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네. 하지만 짧은 초들은 사제가 미사 경본을 읽을 수 있을 만큼 환히 빛을 발한다네. 하느님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지. 영혼을 위하는 대부분의 일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제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세…. 교회는 낮은 자리에서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할 각오가 서 있는 선의로 충만한 많은 사제들을 필요로 한다네. 자네는 그런 사제들 가운데 하나가 될 걸세.’

그 젊은이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다시 책을 손에 들었으며, 교회는 브라질의 보로로 인디언들 속에서 일생을 바친 위대한 선교사 요한 발초라 신부를 얻게 되었다.”(『사랑에 강요되어』 34-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