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양성자료 , 평생양성자료

그녀는 돈 보스코의 첫째 가는 주요 협력자였으며, 실천적인 친절로 예방교육의 모성적 요소가 되었다.

번째 살레시오 협력자, 가경자 맘마 마르게리타 기일(11 25)

맘마 마르게리타는 1788년 4월 10일 카프릴리오(아스티)에서 태어났으며, 같은 날 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프란치스코 보스코와 결혼하면서 베키에서 살게 되었다. 스물아홉에 남편을 일찍 여읜 마르게리타는 극심한 기근기에 혼자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녀는 시어머니와 전처 소생의 큰아들 안토니오를 돌보고 자기 소생의 두 아들(요셉과 요한)을 교육했다.

그녀는 분명한 생각을 지닌 강한 여인이었다. 결단력이 있었던 그녀는 강퍅하기까지 한 삶을 소박히 살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친절했고 자녀들에게 합리적으로 그리스도교 교육을 시켰다. 기질이 서로 다른 세 아들을 기르면서,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억울하게 만들지 않았고 똑같이 대하려 애썼다.

때로는 특단의 대책(가정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고 공부할 기회를 주기 위해 어린 막내아들요한을 집에서 내보내야 하는 등)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지만, 믿음과 지혜와 용기로 세 아들의 성향들을 각기 존중해 주어 그들이 성장하면서 넉넉하고 진취적인 정신을 지닐 수 있도록 도왔다.

그녀는 요한의 사제직 여정에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동행했으며, 58세 때 자신의 집을 떠나 가난하고 버림받은 토리노 소년들 사이에서 요한의 사명에 함께했다(1846년). 여기(토리노 발도코 오라토리오)에서 10년 간, 그녀의 삶은 아들의 삶과 살레시오 사업의 시작에 녹아들었다. 그녀는 돈 보스코의 첫째 가는 주요 협력자였으며, 실천적인 친절로 예방교육의 모성적 요소가 되었다. 부지불식간에 그녀는 도미니코 사비오와 미카엘 루아 신부와 같은 수많은 성인을 양성한 살레시오 가족의 ‘공동 창립자’가 된 셈이었다.

그녀는 문맹이었으나 높은 데서 오는 지혜를 풍부히 지녔으며 따라서 거리의 수많은 소년들을 도울 수 있었다. 그녀는 하느님을 첫자리에 두었으며 가난과 기도와 희생 속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데 온 생애를 바쳤다.

마르게리타는 1856년 11월 25일 토리노에서 선종했다. 향년 68세. 어머니를 잃은 듯 슬퍼하는 아이들의 무리가 묘지까지 그녀의 유해를 따라갔다.

2006년 「살레시오 가족 생활지표 해설서」에서 파스칼 차베스 총장 신부는 맘마 마르게리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교리 교육

맘마 마르게리타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서 교리 교육을 위한 자료를 찾아내는 흔치 않은 자질을 지녔습니다. 그녀는 자녀 신앙교육의 첫 책임자임을 명심하면서 가정이라는 학교에서 단순하지만 소중한 가치들을 자녀들에게 제시할 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성장기 자녀들에게 인내로이 전달한 것은 강철 같은 그녀의 신앙, 늘 현존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감각 그리고 성모님께 대한 애정 어린 신심이었습니다.

맘마 마르게리타의 교리는 유명합니다.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던 그녀가 어릴 때 외우며 배웠던 교리를 자녀들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틀릴 수 없는 어머니의 직관으로 그것에 관해 설명하고 요약하기도 했습니다.

다음과 같이 짧은 문장으로 표현된 신앙의 중요한 진리를 가장 단순하고 초보적인 형태로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보고 계신다.: 모든 순간에 유효한 진리입니다. 두려움을 갖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늘 그들을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나 좋으신지!: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주면서 감동을 일으키는 것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감탄하였습니다.

하느님께 장난으로 하면 안 된다!: 악과 죄에 대한 무서움을 가르쳐 주려 할 때 이렇게 단언하였습니다.

좋은 일을 할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자녀들이 좀 더 부지런하고 관대하게 되도록 자극을 주고 싶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혼은 보기 흉한데, 좋은 옷은 입어서 뭐하겠니?: 기품 있는 청빈을 살아가도록 하고 영혼의 내적 아름다움을 가꾸도록 자녀들을 교육하려고 할 때 이렇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사에 관한 교리도 있습니다. 돈 보스코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맘마 마르게리타가 어린 요한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요한의 첫영성체 날이 가까워져 오자 그녀는 날마다 그에게 몇 가지 기도문과 특별한 독서를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잘 준비시켰습니다(사순절 동안에 세 번 되풀이하게 했습니다). 그 중대한 날(1826년 부활 대축일), 어린 요한이 참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체험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날 맘마 마르게리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네 마음을 차지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이제 죽을 때까지 선하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하렴.”

마지막으로 애덕에 관한 교리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을 때든, 흉년이 들어 굶주림에 시달릴 때든 맘마 마르게리타의 집 대문은 가난한 이, 나그네, 부랑인들 그리고 포도주 한 잔을 청하는 순찰 경관들, 도덕적 어려움에 처한 소녀들 등 모두에게 언제나 열려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웃 사람들이 역경에 처했을 때, 도움이 필요한 환자가 생겼을 때 혹은 임종자의 마지막 순간을 동반해 주어야 할 경우에도 그 집의 대문은 늘 열려 있었습니다.

살레시오 협력자

돈 보스코가 실천한 예방교육에는 모성적이고 온화하고 안심시키는 방식, 강조점, 색깔이 있습니다. 이는 맘마 마르게리타가 멀리서 뿐만 아니라, 안으로부터 영감을 주는 이, 모범을 보이는 이, 협조자로서, 즉 첫 살레시오 협력자로서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살레시오 카리스마의 심장이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가족정신에 중대한 영향을 준 것은 발도코에서 지낸 맘마 마르게리타 생애의 마지막 10년이었습니다. 그 10년은 사실 보통 10년이 아니었습니다. 첫째로, 발도코의 분위기란 이름으로 역사에 전해질 그 분위기의 기초를 놓는 시기였습니다. 돈 보스코는 실질적인 필요성 때문에 어머니를 초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맘마 마르게리타의 현존은 일시적인 필요성 충족이라는 목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탄생 초기의 카리스마에 섭리로 협조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맘마 마르게리타는 이 새로운 부르심을 깨달았습니다. 겸손하고 현명하게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가장 힘든 순간에 보여 주었던 그녀의 용기를 설명해 줍니다. 예를 들면 콜레라 전염병이 돌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병자들을 싸매기 위해서 제대보를 사용한 것과 같은 예언적인 말과 제스처를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 유명한 살레시오 고유 전통인 ‘밤인사(저녁말씀)’의 예도 있습니다. 돈 보스코가 큰 중요성을 둔 밤인사는, 첫 번째로 받아들인 고아들에게 맘마 마르게리타가 짧은 훈화를 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돈 보스코는 이 관습을 성당에서 강론 형식으로 하지 않고 운동장이나 복도 혹은 회랑에서 아버지처럼 친근한 분위기에서 하였습니다.

맘마 마르게리타의 기량이 이러하니 그 아들이 전문 교육자가 되었을 때도 언제나 그 어머니에게서 배울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레뮈엔 신부님의 말을 인용하여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맘마 마르게리타는 오라토리오의 화신(化身)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