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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들

11월10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수고했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죽기보다 싫어들 하십니다. 말 마디 그대로 천사들이십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는 오늘 복음말씀을 그대로 살고 계시는 분들이시지요.

그분들의 삶 앞에 저 같은 날나리 수도자들은 부끄럽기만 합니다. 말로는 그럴듯하게 “봉사 없는 삶은 무의미한 삶입니다. 봉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가는 의무입니다!” 라고 습관처럼 외쳐대지만 공허한 메아리로 제게로 되돌아옵니다.

몇 년 전 성목요일 최후의 만찬 예식 때의 일이었습니다. 여러 신부님들이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했었는데, 강론을 맡으셨던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사제들은 도대체 언제 봉사를 합니까? 우리들은 일년 내내 형제들이나 신자들로부터 봉사만 받다가 1년에 딱 한 번 성목요일 세족례 예식 때만 그럴듯한 표정을 지으며 봉사를 합니다.

우리의 사제직은 무엇보다도 봉사하기 위한 직분입니다. 우리 사제들의 봉사는 1년에 한 번 만이 아니라 365일 지속되어야 하며, 제대 위에서의 성무집행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델 예수님은 섬김의 왕이었지 섬김을 받던 왕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높다란 왕좌에 앉아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왕이 결코 아니셨습니다. 산해진미가 그득한 주안상 앞에 편안히 앉아서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호의호식하던 왕도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왕이셨습니까? 호화찬란한 왕궁은 고사하고 초라한 여인숙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쓰디쓴 고난의 잔을 기꺼이 받아 마셔야 했던 고통의 왕이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눈물을 머금고 차마 가기 싫었던 형극의 길을 걸어가야 했던 슬픈 모습의 왕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어주셨던 섬김의 왕이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제, 모든 수도자,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섬김의 왕으로 살아가도록 마음 모아 기도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 최선의 봉사를 다한 뒤에 조용하고 겸손하게 물러나는 우리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노력, 우리의 수고, 우리의 땀, 우리의 봉사가 인간들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쭐대지 않고 티내지 않고 오버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 속에 묵묵히 참된 봉사를 실천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