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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어디에서 예배하느냐보다, 어떻게 예배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예배당보다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9월11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개별 그리스도인이 수행해야 할 아주 중요한 직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언직입니다.
예언직이라는 표현 앞에 큰 부담을 지닐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구심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내게는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이라 초능력도 없는데,
나같은 사람에게 무슨 예언을 하라는 말인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본질적인 직무는, 미래에 다가올 뭔가 대단한 일을 알아맞추는 일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의중,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감없이 전달하는
메신저로서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중차대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백성들 앞에 모범이 되는 스승이요 교사, 안내자요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가장 기본적인 측면이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은 외침이나 멸망, 큰 환난이나 대기근이 다가왔을 때,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할 때, ‘여러분들, 바로 이 길이 정답입니다!’라고 외치며 길을 열어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언자라고 해서 다 제대로 된 예언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이비 예언자들이 판을 쳤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경험과 판단으로, 위기 상황 앞에 서 있던 백성들에게 예언의 말을 건넸지만, 사실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삯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직관은 확실했습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루카 복음 6장 39절)

사이비 예언자들을 추종하고 따라갔던 사람들은 그 삯꾼들과 함께 우르르 집단적으로 심연의 구덩이, 멸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금 이 시대 역시 인류 역사 안에 전무후무한 대환난의 시대입니다.
자연스럽게 거짓 예언자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릇된 가르침과 감언이설로 선량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안그래도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을 더 큰 혼란 속으로 빠트리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부지기수로 등장하고 소멸해갔던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했던 방향성이 있었습니다.
과도한 성전지상주의, 지나친 성직주의, 극단적인 물질만능주의였습니다.
인류나 국가 공동체의 공동선이나 이웃과의 연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깊이 함몰되어, 다들 집단으로 멸망의 길로 걸어들어갔습니다.

오늘날도 거짓 예언자들, 그릇된 목자들이 자신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교’라든지 ‘애국’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듣는 사람들 민망하게 만들면서, 나라 전체를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고통이나 아픔 앞에 고민하고 근심해야 마땅한데, 지금은 정 반대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근심거리요 치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과 얼굴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훌륭한 목사님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온 나라를 흙탕물로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선량한 목회자들께서 겪고 계실 참담함과 부끄러움이 참으로 크실 것입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며, 목회중이던 예배당을 과감하게 처분해서 신자들에게 돌려준, 경기도 한 작은 교회 목사님의 말씀과 결단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어디에서 예배하느냐보다, 어떻게 예배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예배당보다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집을 위해서 가족을 희생하는 사람은 없죠.

지금은 콘크리트에 갇혀서 자기들만의 리그, 자기들만의 행복한 예배 공간, 예배 나눔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입니다.”
(이규원 목사)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