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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간적 관점을 버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9월10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어제 4가지 행복·불행 선언에 이어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유명한  ‘원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목표치가 너무 까마득해 보이고 불가능해 보여, 우리 각자의 구체적인 삶 속에 적용시키가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루카 복음 6장 27~29절)

원수 사랑을 주제로 한 예수님의 권고 말씀을 들으시고, ‘해도 해도 너무하신 예수님’이라는 생각과 함께 실망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어떤 누군가에게는 가능하겠지만, 나한테만은 절대로 불가능한 목표라고 여기고 아예 포기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원수’란 단어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는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힘으로 내리누르고 있는 로마 군대요, 로마 황제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도 혐오하던 이방인들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작고하신 최인호 베드로 선생님의 해설이 명품입니다. 아래 글은 작가께서 유명을 달리하셨을 때, 형님·동생하며 막역하게 지냈던 명배우 안성기 사도 요한 선생님께서 하셨던 조사(弔辭) 가운데 일부입니다.

⟪최 베드로, 인호 형님이 가톨릭에 귀의하여 막 세례성사를 받은 직후였던 것 같습니다. “아우야,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무슨 말인 줄 알겠냐?” 그 당연하고도 쉬운 질문에 저는 무슨 다른 뜻이 있을까,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지요. “

그야 말로 원수를, 적을, 나쁜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일까? 아냐, 그런 사람은 원수가 될 수 없어. 안 보면 그만이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이야. 그럼 가장 가까운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자기 아내, 자기 남편, 자기 자식, 자기 부모들이지. 이들을 열심히 사랑하라는 말이지.”⟫(최인호 유고집 ‘눈물’, 여백 참조)

예수님의 당부말씀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해도 해도 너무한 요구를 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건 뭐 속도 밸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말씀 아닌가요? 그저 바보 멍청이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정말이지 인간의 힘,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듯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아무나 실천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나’를 탈피할 때, ‘나’라는 질그릇 안에 들어있는 과거의 자아를 완전히 비워낼 때 실천 가능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하느님화’될 때, 인간적 관점을 버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하며 죄인인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자취’가 남아있고 ‘하느님의 인호’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비참하지만 하느님께서 위대하시기에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인간의 비루함과 옹색함을 벗어나 광활한 사랑의 평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원수조차 사랑할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