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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남편과 아내, 아들, 이렇게 셋만 모여 있어도, 그곳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며, 그곳은 곧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9월7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이 엄중한 시기에도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여서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코로나 사태에도 예배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교회가 드리는 현장 예배를 어떠한 경우에도 막아서는 안됩니다. 예배는 기독교의 핵심이자 생명으로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기독교인의 임무입니다.”

백번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생떼를 부리고 있는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주님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 건네시는 말씀을 귀여겨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9~20절)

그토록 큰 위험성을 무릅쓰고 현장 예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교회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까마득한 높이의 첨탑과 초대형 공간, 신도들로 꽉 찬 건물만이 교회인가요?

손에 손에 깃발을 들고 큰 광장에 대규모로 운집해서, 양손을 높이 쳐들고 아멘 아멘!, 알렐루야를 외쳐야만 하느님 백성인가요? 그런데 백번 생각해도 이해하지 못할 일 한 가지! 대체 남의 나라 국기 성조기는 왜 흔들고 다니는가요? 대한민국을 미국의 한 연방 주로 여긴다는 의미인가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님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그분의 복음 말씀을 사는 개별 그리스도인 각자가 새로운 개별 교회입니다. 천 명, 만 명의 신자들이 모인 곳만 교회가 아니라, 세명이나 두명,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단 한 명이라도 올바른 지향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그곳이 곧 교회입니다.

이번 기회에 부디 생각을 바꾸기 바랍니다. 교회 건물 안에서만 대규모로 함께 모여 바치는 현장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라는 생각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생각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장소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고,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간절히 기도하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참된 예배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토록 엄중한 시기 굳이 현장 예배만을 강조하는 사람들, 이 위험한 순간, 끝까지 대면 예배를 포기할 수 없다고 생떼를 쓰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정말 한번 하느님 앞에 진지하게 그 이유를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께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교회로 만드십시오.”

‘현장 예배만이 살길이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외치는 사람들, 오늘은 진지하게 여러분들 가정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굳이 현장으로 나오지 마시고 여러분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여러분의 가정을 교회로 만들어보시기 바랍니다.여러분들의 가정을 작은 교회로 여기고, 가정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가족들과 오붓하게 둘러앉아, 지금 이 고통스런 현실이 조속히 종료되기를 간절히 청하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굳이 현장 예배에 가지 않으셔도, 여러분 가족 구성원들만 둘러 앉아 기도 바치는 순간, 남편과 아내, 아들, 이렇게 셋만 모여 있어도, 그곳에 예수님께서 자리하고 계시며 그곳은 곧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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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짬뽕 같은 안식일 규정>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 ‘바리사이’라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되다’라는 의미를 지녔지요. 그들은 죄인들이나 나환우들이나 그릇된 신앙인들과는 분리되고 차별화된 정통 신앙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원래 바리사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유일무이한 계시라고 강조하는 사제들에 반대하던 평신도 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예언서들과 시편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과 제사를 드리려했습니다. 이토록 좋은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신앙생활은 점점 복잡해지고 부담스럽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고 빈틈없는 신앙생활을 추구하던 그들이었기에 613개나 되는 율법 조항에 대한 준수뿐만 아니라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실천사항까지 세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응답으로 시작되었던 그들의 신앙행위는 점점 반드시 해치워야만 하는 의무사항이자 무거운 짐, 족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신앙은 정신보다 제사행위 자체에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내면보다는 겉치레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달리 강조한 것 규정 가운데 정말 웃기는 규정들이 있었는데, 정결 예식이요,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외출했다가 귀가했을 때 물이 떨어져서 손이나 발을 못 씻을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는데, 씻지 않으면 완전 중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안식일만 되면 누가 규정을 어기나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안식일에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어도 요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죽어가도 안식일에는 치료행위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종교의 힘을 통한 영적 학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종의 종교 중독으로 인한 이상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꽤 뚫고 계시던 예수님,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삶의 방식,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동 양식을 죽어도 참아내지 못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고 있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같지도 않은 법, ‘웃기는 짬뽕’같은 안식일 규정을 사정없이 짓뭉개십니다. 마침 회당 안에 오른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한 명 앉아있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무릎을 탁 치며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그의 병을 고쳐주기만 하면 즉시 고발하고 체포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힘 꽤나 쓰던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여차하면 예수님께서 조기 체포되시고 계획하고 계신 공생활이 어긋나버릴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제가 만일 그 당시 예수님이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묵상해봅니다. 살벌한 분위기임을 직감하고 잠시 치유활동을 뒤로 미뤘을 것입니다. 회당에서의 가르침이 끝나고 군중들이 돌아가고 나면 따로 그를 불러서 조용히 치유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당당하고 의연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따가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환우에게 외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예수님의 범법행위 앞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궁시렁궁시렁대기 시작합니다. 얼굴들도 울그락불그락해졌습니다. 눈들은 분노로 가득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예수님을 체포라도 할 험악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 역시 거룩한 분노로 사악한 그들을 향해 크게 외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복음 6장 9절) 보란 듯이 안식일 규정을 산산조각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우리 역시 제도나 규정의 틀에 사로잡혀 이웃을 단죄하거나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