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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곤경에 처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일보다 훨씬 소중합니다!

9월5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사람들 사이에 살아가면서 늘 조심하고 경계해야할 태도가 있습니다. 확대해석이나 과잉반응입니다. 침소봉대(針小棒大)란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작은 바늘을 보고 큰 몽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별것 아닌 아주 작은 일인데, 마치 세상 끝나기라도 하는 듯, 난리를 치면서 호들갑을 떠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성향 가진 사람들 견뎌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과도하게 편향되고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에 백성들은 크게 환호하고 박수를 쳤지만, 그들은 늘 부정적이고 삐딱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를 잡아 물어 뜯고 늘어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소인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대인배였습니다. 적대자들이 아무리 헐뜯고 비난해도 일희일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좁은 마음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그들의 회개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매사에 여유가 있고 넉넉했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복음 선포 여행을 떠난 예수님과 제자단의 행보는 지극히 소박하고 가난했습니다. 많은 짐을 실은 낙타 부대며, 여러 명의 노예며, 큼지막한 가마를 갖춘 럭셔리한 여행단이 아니었습니다.

손에 든 것이라고는 고작 뱀이나 전갈 방어용 지팡이 하나씩 밖에 없었습니다. 짐보따리도 없었습니다. 갈아입을 여벌 옷이나 비상 식량도 없었습니다. 우르르 무리지어 다니면서 누군가가 숙소를 제공해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습니다. 한끼 식사라도 제공해주면 감지덕지하면서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발길 닿는 고을 마다 환대한 것이 아니었기에, 때로 몇 끼니나 쫄쫄 굶으며 건너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밀밭 사이를 걸어가던 제자들이었기에, 자동으로 손이 밀 이삭으로 갔었겠지요. 지독한 허기를 조금이라도 면하려고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서 입에 털어넣었습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바리사이들은 이게 웬떡이냐며 즉시 태클을 걸어왔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오?”(루카 복음 6장 2절)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한 가지 포인트! 안식일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과도한 해석입니다. 이스라엘 전통 안에 이런 예외가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밀이삭을 자르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이웃의 포도밭에 들어갈 경우, 원하는 만큼 배불리 포도를 먹을 수는 있지만 그릇에 담아서는 안 된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신명기 23장 25~26절)

바리사이들은 특별히 안식일 규정에 각별한 의미를 두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과도하게 해석했고, 무리하게 적용시켜 가난한 백성들을 억눌렀습니다. 그들은 밀 이삭 몇 가닥 자르는 것도 추수의 한 형태로 봤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어기고 훼손시키는 노동 행위 29가지를 나열했고, 29가지는 각각 또 다른 가지를 쳐서 세밀하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백성들 입장에서 그 얼마나 답답하고 고약한 안식일 규정이었겠습니까?

만일 부주의로 누군가가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면 1차 경고를 받고 벌로 속죄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1차 경고를 받은 사람이 또 다시 목격자가 있는 앞에서 안식을 규정을 어기게 되면, 그 벌로 돌로 쳐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비인간적으로 가혹한 안식일 규정의 폐단을 똑똑히 당신 눈으로 보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중요시 여겼던 안식일 규정을 보란듯이 산산조각 내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안식일을 선포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다.”(루카 복음 6장 5절)

곤경에 처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일보다 훨씬 소중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율법 조항 하나 하나에 얽매이신 작은 분이 아니라 자비로 충만한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