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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재물보다 더 가치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

8월18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1)재물보다 더 가치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

그는 이미 완전한 자 되는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오 복음 19장 21절)

위의 예수님 말씀을 들으시고, 나름 지닌 재산으로 인해, 복음서에 등장하는 젊은이처럼 슬퍼하거나 실망하고 계시는 분들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씀 전후 맥락을 살펴볼 때, 너무 슬퍼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셔도 될 듯 싶습니다. 울며 가슴치면서 예수님이나 교회 공동체를 떠나가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만일 배우자와 여러 명의 성장기 자녀들, 연로하신 부모님의 생계까지 책임지고 계신 가장께서,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셔서 즉각적 행동으로 옮긴다면 큰일 날 일입니다.

본인이야 가장으로서의 힘겨운 십자가나 속세의 질긴 인연들 훌훌 털어버리고, 한 마리 어여쁜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버리면 마음이 홀가분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남게 될 가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겠습니다. 가장으로서 그보다 더 무책임한 모습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오히려 복음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며, 한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예의나 품위를 저버리는 악덕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한 가정의 가장은 정직하고 양심적인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서 재물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투명한 시대 앞에서, 돌발 상황에 대비해서 안정적 재정 확보를 위해 뛰고 또 뛰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한 그리스도인 가장으로서 취해야 할 바람직한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과도함’ ‘지나침’에 있습니다. 뭐든 적당해야 합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진리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재물에 목숨을 걸며, 재물을 하느님 위치로 격상시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이 그토록 애써 쌓아올린 재물이라는 탑에 깔려 제 명도 못챙기는 사람 참 많습니다.

평생 한눈 한 번 안 팔고 기를 쓰고 쌓아올린 천문학적 액수의 재물을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한채, 억울해서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는 사람들, 한 마디로 열심히 죽쒀서 개주는 사람들 참 많이 봤습니다.

넉넉해졌다면 주변도 한번씩 돌아보면 좋겠습니까? 재물의 결핍으로 인해 하루 하루, 아슬아슬, 삶과 죽음의 기로를 넘나드는 이웃들을 위해 관대히 나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자세야말로 제자됨의 모습이고, 완전한 자 되는 지름길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라고 외치며, 돈을 자신의 인생 여정 안에서 최고로 높은 위치에 올려놓았던 지닌 삶을 가슴치며, 늦었지만 돈보다 더 가치있는 대상들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 다른 무엇에 앞서 좋으신 주님과 신앙을 자신의 인생에 있어 최우선권을 부여하는 사람은 이미 완전한 자 되는 길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인생사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주변 환경을 찬찬히 한번 살펴볼 일입니다. 과연 돈보다 더 우위에 있는 대상, 돈과는 비교가 안되는 특별한 것이 무엇인지 유심히 한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없을 것 같지만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 대상들을 찾아내고, 그 대상들에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더 깊이 사랑하는 노력, 그것이 배금주의와 황금만능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황금만능주의에 흠뻑 젖어 살아가는 한 유다 청년과,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해서, 참으로 듣기 거북한 쓴소리를 건네십니다.

그러나 외면하지 말고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 자리에서 주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가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오 복음 19장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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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청빈생활>

수도자들을 양성시키는 신학원의 책임자로 있을 때였습니다. 처음으로 책임자 직책을 맡은 데다 수도자 양성이라는 막중한 사명감에 대한 부담이 합쳐져 이런 저런 요구들을 참 많이도 했습니다.

말 한마디 해도 신랄하고 날카롭게 하게 되더군요. 부족한 점이 눈에 띄면 가차 없이 지적도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처신한 것은 아무래도 후배들이 정말 제대로 된 수도자로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울타리 안에 살아가던 아이들을 만나면 한없이 부드럽게, 끝없이 받아주는 제 이중적인 모습이 형제들의 눈을 거스르게 했던가 봅니다.

언젠가 한 형제가 밤에 찾아와 제게 신중히 했던 조언의 요지는 “저희도 사랑받고 싶습니다.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 반만이라도 저희들에게 보여주십시오.”

방한 중에 교황님께서 보이신 행보 가운데서도 그런 측면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평신도들이나 사회의 약자, 아이들, 청소년들, 가난하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야말로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교황님이셨습니다. 갖은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료 주교들과 사제들, 수도자들을 만나셨을 때 교황님의 태도나 어조는 사뭇 달랐습니다. 말씀에 날이 서 있었습니다. 때로 섬뜩할 정도로 적나라한 경고성 말씀을 가감 없이 던지셨습니다. 가슴이 철렁할 정도였습니다.

요즘 저희 동료들끼리 농담 삼아 나누는 이야기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사제 생활 그동안 편했는데 교황님 방한하고 나서 많이 힘들어졌다 ㅋㅋㅋ”

방한 기간 중 수도자들과의 만남 시간 때 청빈과 관련된 말씀이 아직도 강한 울림으로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봉헌 생활에서 청빈은 ‘방벽’이자 ‘어머니’입니다. 봉헌 생활을 지켜 주기에 ‘방벽’이고, 성장하도록 돕고 올바른 길로 이끌기에 ‘어머니’입니다.

청빈 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수도자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오늘 우리의 청빈생활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오늘날로 치면 수도자들이었던 제자들을 향해 청빈생활과 관련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입문 과정에 있는 후배 수도자들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고마움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측은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그 나이 또래들이 하루 온 종일 갖고 노는 스마트폰도 없습니다. 주머니 뒤져봐야 땡전 한 푼 없습니다. 그저 갖고 다니는 것이라곤 묵주와 양심성찰용 작은 수첩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나름 최대한 청빈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인데… 그렇다면 교황님께서 강조하신 ‘부자 수도자들’은 무슨 의미일까?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생각해봅니다.

청빈에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과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대한 아끼고 절약하며 사는 것,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은 조금은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입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다양한 가능성과 장점, 강점이 무엇인지를 찾고, 최대한 개발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 정말 근사한 청빈생활입니다.

내게 주어진 24시간이란 보물을 효과 있게 구성해서 보다 충만하고 기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래서 힘겨워하는 이웃들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청빈생활이겠습니까?

한평생 게으르게 살지 않는 것,
꾸준히 맡은 일에 충실한 것,
하루하루 보람되게 살아가는 것,

결국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선물이 되어주는 일,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건강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일, 참으로 의미 있는 청빈생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