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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비빌 언덕도, 배경도 없던 철부지들

7월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성경에 의인이란 말이 가끔씩 등장합니다. 의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불의에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 저항의 선봉에 선 투쟁가 등, 강성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뜻은 다른 데 있습니다. 한자 옳을 의(義)를 분석해볼까요? 양(羊)자와 아(我)가 결합되어 있네요. 그러고 보니 의인이란 ‘내 안에 양(羊)있는 사람’입니다.

양이란 동물은 고분고분, 순종, 순수, 순결함, 순박함의 대명사입니다. 결국 의인이란 진리 앞에 자신을 활짝 개방시킬 여유가 있는 열린 사람, 예수님이란 새로운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관대한 사람, 부드러운 사람, 다시 말해서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한 철부지들을 말합니다.

어제 예수님께서 신랄한 독설을 인정사정없이 퍼부으셨던 도시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 도시들에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율법학교, 회당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도시들은 당시 잘 나가던 율법학자들의 집결지였습니다. 가방끈 긴 사람들이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지니고 있던 지식은 산 지식이 아니라 죽은 지식이었습니다. 지도자요 학자로서 가장 중요한, 미래를 향한 열린 마음과 겸손함이 결여된 그들이었기에, 교만과 아집으로 눈이 먼 그들이었기에,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아버지의 초대를 결정적으로 거절하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너무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한평생 목숨 걸고 하느님을 연구했지만, 따뜻하고 열린 가슴이 없었기에, 교만과 불손으로 눈이 가려져 있었기에,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하느님만 찾아 헤맸습니다.

평생에 걸친 그들의 공부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묘하게도 당대 내놓으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철부지들 앞에 자신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가난한 철부지들, 이 세상 그 어디 가도 믿을 구석 한 군데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빌 언덕도, 밀어줄 배경조차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저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보다 자연스럽게, 보다 쉽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워낙 가진 것이 없다보니, 워낙 삶이 절박하다보니, 하느님의 도우심이, 하느님의 사랑이 더 간절했던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시는 하느님은 오늘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로 다가오십니다. 시련의 크기가 큰 만큼 오래지 않아 다가올 그분 사랑도 클 것입니다. 고통의 깊이가 깊은 만큼 하느님 은총과 축복도 커져만 갈 것입니다.

가난한 철부지인 우리들이 조금만 더 노력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눈이 조금만 더 맑게 트인다면, 우리 영혼이 조금만 더 순수성을 회복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크신 상급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고통 그 한가운데 현존하심을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지루함의 연속이 아니라 신비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천국의 한 조각임을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