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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주의 종말에 대해서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각자 자신의 종말을 잘 준비합시다!

7월10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선교 일선에 나선 복음 선포자들의 하루하루는 결코 편안하거나 안락한 나날이 아니었습니다.
적대자들로부터 수시로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특히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이 동족들로부터 받았던 협박과 모욕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천벌 받을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이런 초세기 그리스도 신자들을 향해 건네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 10장 22절)

더불어 심한 협박이나 박해 앞에 너무 정면 대응하지 말고 지혜롭게 처신하라고 구체적인 행동 강령까지 내려주셨습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마태오 복음 10장 23절)

사실 이스라엘 국토의 면적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면적이 작은 나라에 속하는데, 우리보다 훨씬 소국입니다.
전라남북도 합한 정도입니다.
이 정도 면적이라면 도보로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겠습니다.
아주 천천히 돌아도 6개월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면 6개월 안에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종말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복음서 안에는 유다 묵시문학의 흔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스라엘 전역에 성행했던 묵시 문학은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시도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다가오셨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날과 그 시간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유다 묵시문학과 종말 신앙을 하나로 묶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거짓 목자들이 주로 애용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대희년같이 숫자상으로 ‘있어 보이는’ 순간만 되면 종말 임박 신앙이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으로 솟아올랐습니다.
아마도 2050년 2100년이 되면 무수한 사이비 교주들이 또 다시 거짓 종말 임박 신앙으로 선량한 백성들을 현혹시킬 것입니다.

종말 임박 신앙이 위험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상적 삶을 깡그리 무시하고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며칠 뒤에 세상이 끝난다는 데 직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 때려치우고 임박한 종말을 준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한 인간 존재, 한 가정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악령들이 종말 임박 신앙을 가르치는 사이비 교주들인 것입니다.

종말 신앙 앞에서 우리가 취한 태도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오늘 하루를 마지막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가 끝나면 그 하루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느님께서 또 다시 은총의 선물로 이 하루를 주셨구나!’
감사하며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조금은 지루해보이고 남루해보이는 우리네 일상사지만 그 안에 주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으며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엮어가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이나 우주의 종말에 대해서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각자 자신의 종말이 개인의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