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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가장 가난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을 큰 죄악으로 여깁니다!

7월9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언젠가 장장 12~3년이나 되는 오랜 양성기간을 마무리한 형제들, 이제 곧 사제품을 받고 본격적인 사목 일선에 투입될 형제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기에, 다양한 어려움이 곳곳에 산재한 십자가 길이기에, 선배로서 이런 저런 충고를 하다보니 말이 자꾸만 길어지더군요.

“잘 아시는 바처럼 사제품은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여러분은 신입사원도 아니고 수습사원인 셈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궂은 일을 하는데 주저하지 말길 바랍니다.
만나게 될 신자들과 청소년들, 함께 일하는 직원분들 앞에서 한결같이 겸손한 자세를 유지해 주십시오.

‘내가 신부인데! 내가 시설장인데!’하는 말은 절대 금지입니다.
무엇보다도 머리둘 곳 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평생 가난한 사제로 살아주십시오.
소임이동 때는 여행용 가방 두개면 충분합니다.
양손에 가방 두개 달랑 들고 고속버스 타고 이동해주시면 그 자체만으로 사제로서 성공한 삶입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저처럼 훈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 용 짐을 이런 식으로 꾸리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규범’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말씀 가운데 유독 다음의 말씀이 가슴이 꽂힙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마태오 복음 10장 8~10절)

돌아보니 저도 형제들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요구는 무리한 요구를 넘어, 해도 해도 너무한 상상을 초월하는 요구였습니다.

짧지 않은 여행길이었을텐데, 적어도 갈아 입을 여벌 옷 몇벌, 그리고 옷을 넣을 보따리 하나 정도는 지니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벌 옷도, 보따리도 챙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푼 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 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목자들이 교우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은 스스로 천막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 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 날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곳 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복음적 청빈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몇몇 수녀회 수녀님들을 바라보며 실낱같은 희망을 지닙니다.
그분들은 가장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생활을 큰 죄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사목 활동 지역은 언제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살아가는 거주 지역입니다.
그 지역이 개발되어 부촌으로 탈바꿈하면 아무 미련없이 또 다른 가난한 지역으로 떠나갑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