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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7월6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네 복음서에 실린 이적(異蹟) 사화 혹은 기적 사화 30편은 크게 네 가지 사화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병을 치유하는 치유이적사화, 악령을 추방하는 구마이적사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소생이적사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자연이적사화 4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서에는 두 가지 이적사화, 즉 치유이적사화와 소생이적사화가 동시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이적사화들을 통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대부분의 치유이적사화에서 강조되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치유를 위한 가장 1차적인 조건은 믿음입니다.

치유를 이행하는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필요하지만, 치유대상자인 환자의 믿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치유되면 고맙고 되지 않아도 괜찮고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므로 꼭 치유시켜주시리라 믿는 강한 믿음이 치유의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신 이유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치유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치유자와 치유 대상자 사이의 교감과 공감입니다.

이미 숨이 넘어간 회당장의 딸을 소생시키신 예수님의 기적을 묵상하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입니다. 소생사화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교훈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소생된 회당장의 딸은 물론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인지는 모르지만 남아있는 생애를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3~40년 세월이 흐른 후 또 다시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생이 무한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소생보다는 영원한 주님 나라에서의 영생에 더 큰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생사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진정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필멸(必滅)의 존재이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복음 11장 25~26절)

곰곰히 생각해보니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바로 저였습니다. 근원적 결핍과 모남과 나약함으로 인해 틈만 나면 여기저기 상처입고 영혼의 피를 흘리던 저였습니다. 피투성이 인생에도 불구하고 그 잘난 자존심때문에 혈루증 여인처럼 솔직하고 용기있게 주님께 매달리지 못하는 제가 더 심각한 중증의 환자입니다.

어떻게서든 혈루증 여인처럼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주님 옷자락 술에 내 손길만 닿으면 반드시 회복되리라는 간절한 믿음을 지니고, 주님을 향해 손을 뻗어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죽은 회당장의 딸이 바로 저였습니다. 육신은 버젓이 살아있지만 영혼이 죽어버린 상태로, 허깨비처럼, 좀비처럼 흐느적 흐느적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어둡고 깊은 동굴 속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숨만 겨우 쉬고 있지,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한 삶을 마지못해 연명해왔습니다.

다시금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주님 손길에 온전히 의탁함을 통해, 그분께서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고, 나를 온전히 차지하게 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내 안에서 나는 점점 사라지고 주님께서는 점점 더 커지시는, 그래서 잠시라도 참된 삶을 살수 있도록 나를 완전히 비워봐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