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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쁨과 설렘의 단식

7월4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철저한 자기 통제와 금욕주의로 유명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의 의복은 낙타털로 만든 거적대기 하나 걸친 것이 전부였기에 우스꽝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는 도통 먹는 것에 관심이 없었는데, 틈만 나면 단식이요, 수시로 쫄쫄 굶었는데, 가끔씩 메뚜기와 들꿀로만 겨우겨우 허기를 채웠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 역시 단식은 일상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 역시 ‘단식’의 선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꼬박꼬박 단식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단식과 성덕이 언제나 함께 가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일정 부분 맞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저도 요즘 몸무게가 급격히 늘고 나서부터 드는 느낌입니다. 뱃살이 접히기 시작하면서 그렇지 않을 때보다 기도나 묵상에 전념하기가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특히 유다교 여러 신심행위 안에서 단식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단식은 영혼이 육체를 지배함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은총을 준비하는 사전 작업으로 단식을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큰 축제를 앞두고 철저하게도 단식을 실천하곤 했습니다. 단식 기간에늗 영혼이 맑아지고 하느님 은총 앞에 민감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단식은 우리 영혼을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도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앞두고 광야로 나가셔서 40일 동안이나 단식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단식이 사라지고 맙니다. 사람들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기쁘게 잔치자리에 앉으셨습니다. 맛나게 음식을 드셨고 포도주를 즐기셨습니다. 얼마나 흥겹게 그런 자리를 즐기셨던지 바리사이들은 볼멘 목소리로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 아닌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꽤나 의아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을 던지는데, 질문의 뉘앙스가 꽤나 질책성입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문제의 본질에 초점을 맞춥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이 지상에서 활동하는 공생활 기간은 하느님과 인류의 혼인 잔치 시기임을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신부인 교회와 혼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확증하십니다.

제자들을 포함한 인류 모두는 이제 신부인 교회와 함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잔치의 주관자이자 혼주이신 하느님, 혼인잔치와 주인공 격인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초대받은 손님들인 인류에게 주어진 과제는 즐기는 것입니다. 만끽하는 것입니다.

단식이 절대로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유쾌한 시기에 단식은 너무나도 안 어울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단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단식은 고통과 슬픔의 단식이 아니라 기쁨과 설렘의 단식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랑이신 그리스도, 신부인 교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지상 생활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결론은 항상 축제와 기쁨이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