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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는데…

7월2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부모들이 영유아기, 그리고 청소년기를 보내는 아이들에게 사용하는 언어가 과도하게 억압적이고 부정적이라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물론 어린 자녀를 건강하고 안전하게 성장시키고자 하는 부모의 보호본능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 스스로 통제 능력을 기를 수 있을 때 까지 부모가 개입해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억압적이고 거부적인 메시지를 계속 반복해서 어린 자녀에게 전달하다보면 아이가 의기소침해지고 소극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거기 들어가면 않돼, 이리 나와! 그거 만지면 않돼, 이리 줘! 여기서는 떠들면 않돼, 조용히 해! 하루에 수십 번 수백 번도 ‘않되’를 연발합니다.

한 미국 청소년은 어린 시절 엄마 아빠가 얼마나 않되(No-No)를 입에 붙이고 살았던지 당시 자신의 이름이 peter No-No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은연중에 얼마나 이웃들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모릅니다. 쉽게 낙인찍고 쉽게 포기합니다.

“저 사람은 원래 저래.”
“하늘이 두 쪽 나도 않되는 사람은 않되.”
“저 사람은 정말 구제불능이야. 도무지 희망이 안보여.”

사람들이 평상에 뉘어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중풍 병자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시선 역시 그랬을 것입니다.

“저 사람 인생은 진작 종친거야.”
“저렇게 살아서 도대체 뭐해?”
“나 같으면 벌써 죽고 말았겠다.”

사실 중풍병자의 삶은 너무도 기구했습니다. 산다는 것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순간순간 그 누구에겐가 민폐만 끼치는 일이었습니다.

스스로의 삶을 정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늘 미안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우리와 철저하게도 달랐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가 벌레 같은 인생, 천벌 받은 삶, ‘거지같은’ 생애였지만 예수님 눈에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할 존재였습니다. 아니 더 우선적 사랑의 대상, 더 우선적 선택의 대상이었습니다.

중풍 병자가 그간 겪어왔던 지독하게도 모진 세월을 측은지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는 이윽고 다정한 음성으로 그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사실 예수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죄였습니다. 중풍 병자에게 있어서도 가장 큰 숙제는 영혼의 짐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중풍 병자는 육체 이전에 영혼이 더 심각하게 병들어 있었습니다. 희망하지 않은 죄, 하느님을 간절히 찾지 않은 죄, 낙담한 죄, 포기한 죄로 인해 그는 육체의 중풍 병자 이전에 영혼의 중풍 병자였습니다.

죄를 짓는 다는 것, 희망하지 않는 다는 것, 좌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문을 굳게 닫아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문은 밖에서 아무리 흔들어대도 열리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열어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한분,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한을 부여받으시고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스스로의 문을 안에서 꼭꼭 걸어 잠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는데, 목숨이 붙어있는 한 희망해야 하는데,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 그분의 완전하심,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믿지 못하고 낙담과 좌절 속에 빠져있지 않은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