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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7월1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여러분들 혹시 미사 참례 중에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나는 여러분들이 봉헌하는 성찬례를 원치 않고 배척합니다. 여러분들의 그 거룩한 척 바치는 미사를 반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바치는 그 가증스런 예물은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르는 성가를 내 귀를 거슬르게 하니 집어치우는게 좋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못 들어주겠습니다.”

미사 봉헌하시는 신부님들이나 참석한 신자들이 이런 말씀을 들었다면 엄청난 충격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정성이나 마음이 사라진 미사, 가난한 이웃들과 구체적으로 연대하지 못하며 드리는 미사, 갖은 잡념과 미성숙한 신심으로 봉헌하는 미사를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실리 만무합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축제와 예배가 딱 그랬습니다. 예언자의 지적은 신랄하고 날카롭습니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하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아모스 예언서 5장 21~23절)

기원전 8세기경 활동한 아모스는 남왕국 유다 트코아 출신 예언자이지만 특이하게도 북왕국 이스라엘에 와서 예언직을 수행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의 임금은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신명기계 역사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여로보암 2세 역시 다른 많은 임금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 물들게 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여로보암 2세가 요르단 건너편 이스라엘 북쪽과 남쪽 국경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하셨음도 인정합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 이스라엘은 대내외적으로 최고의 번영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당시의 국제 상황이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초강대국으로 명성을 떨쳤전 아시리아는 통치권이 급격히 약화되어 ‘내코가 석자’인 관계로 다른 나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다마스쿠스 왕국 역시 아시리아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한 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북쪽의 하맛 왕궁과 부단히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유다 왕국과도 평화로이 지내던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유리한 국제적 상황을 이용해 여로보암 2세는 요르단 건너편으로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정치적 안정은 경제적 번영도 함께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로 인한 폐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가중되면서 경제적 평등이 무너졌습니다. 특정 사람들에게 부와 권력이 편중되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겪는 서러움과 위화감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런 시대 아모스 예언자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 현상을 눈여겨본 아모스 예언자는 부자들의 사치와 향락을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 한 마디를 그들 심장을 향해 던집니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 예언서 5장 24절)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거창한 종교 예식을 거부하시는 이유가 명백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바로 공정과 정의가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지역의 종교 의식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윤리적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신에게 드리는 예배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별개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신에게 바쳐야 할 예배만 제대로 이행하면 신과의 친교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신 주님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분과의 계약은 사람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요구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가운데 주님께 드리는 예배는 아무리 성대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고 주님께서는 그러한 예배를 거부하심을 명확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