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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왜 하필 나인가?

6월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유다 사회 안에서 대대손손 내려오던 관습이나 전통은 구속력, 결집력 측면에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관습은 어기면 인간취급도 못 받게 될 정도의 강제성까지 지니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갓 출생한 남자 아이의 할례와 작명에 관한 유다 전통입니다.

통상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할례식을 거행하고, 동시에 아기의 이름을 짓는데, 그 역할을 주로 친척들이 도맡았습니다.

즈카리야의 친척들은 관례대로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와 똑같이 즈카르야로 명명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벳이 기겁을 하면서 펄쩍 뛰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즈카르야라고 하면 절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친척들은 뚱딴지같은 엘리사벳의 말에 다들 의아해했습니다.
그간 즈카르야 가문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친척들 입장에서 정말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사건이 계속되었습니다.

멀쩡하던 즈카르야가 갑자기 아무 말도 못하는 ‘언어장애우’가 되지 않나, 꼬부랑 할머니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지 않나, 아기의 이름을 전혀 엉뚱하게 짓지 않나…

연속되는 기이한 사건의 종결자는 누가 뭐라 해도 즈카르야였습니다.
엘리사벳의 고집에 친척들은 할 수 없이 말 못하는 즈카르야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겠냐고 손짓으로 물었습니다.

그러자 즈카르야는 ‘화이트보드’를 달라고 하더니 매직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다른 이름은 안 됩니다. 오로지 요한입니다.’

그 글씨를 적는 순간 즈카르야는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 친척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밀고 나갔을까요?

이는 이제 구약 시대가 즈카르야를 통해 종결됨을 암시합니다.
요한은 신약시대, 예수님 시대, 생명과 구원의 때가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세례자 요한, 그는 마치 아침노을 같은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의 개봉박두를 알리는 선구자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때로 우리 앞에도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지곤 합니다.
그때 마다 우리는 신세 한탄에 여념 없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큰 십자가가?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돌발적인 사고가?
왜 하필 나에게만 이토록 끔찍한 바닥 체험을?”

얼마 전에 우리 곁을 떠나가신 박완서 선생님은 오랜 수행의 결실로 큰 은총을 체험하셨다지요.
사고의 틀 자체를 바꾸셨답니다.

‘왜 하필 나인가’ 에서 ‘왜 하필 내가 아니어야 하는가’로 말입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새로운 인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새로운 가치관을 터득시키기 위해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정말 납득하기 힘든 당혹스런 사건들 앞에 설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대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한 침묵입니다.
꾸준한 기다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