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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6월13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선거 때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기상천외하면서도 허무맹랑한 공약들을 남발해서 빅웃음을 선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 재미있는 후보는 입만 열만 ‘억억!’ 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생계 지원금 1억! 결혼 자금 1억! 주택 자금 2억!
참전 용사 5억! 거기에다 유엔 본부 판문점 이전!

하나 하나 따지고 보니 그 후보자가 당선되면 나라 곳간이 금새 바닥이 날것이 백퍼센트 확실시되더군요.
뒷감당 못할 헛공약들 앞에 사람들은 헛웃음만 터트렸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스라엘에도 거짓 예언자들의 헛 공약들이 남발했습니다.
나만 믿고 조금만 기다리면 로마 식민 통치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다.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하고도 드넓은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주겠다.
예루살렘은 온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할 것이며, 뽑힌 백성 유다인들의 곳간은
곡식으로 흘러넘치도록 해주겠다.

돌아보니 저 역시 무수한 헛 공약들을 남발했습니다.
하나 하나 따져보니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마음 속으로 자주 다짐을 합니다.

‘헛된 공약 남발하지 말고 그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런 사람들 있습니다.
“저 엉뚱한 프로젝트 저거 자네가 기획한거지?”하고 물었을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컨데, 그거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제가 했다면 손에 장이라도 지지겠습니다.”

안했으면 그냥 아니라고 이야기하면 좋을텐데,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고 하늘, 땅, 하느님까지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소한 일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존귀하신 하느님까지 증인으로 내세우는 자들 앞에 크게 노여워 하시며, 솔직하고 단순하게 처신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허세와 교만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허무맹랑한 거짓 맹세를 아예 하지 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5장 34~37절)

사실 유다인들은 하느님에 대한 지극한 경외심으로 인해 그분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는 것을 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다는 표현 대신 하늘, 땅, 예루살렘, 머리를 두고 맹세했습니다.

사실 하늘, 땅, 예루살렘 등은 하느님을 지칭하는 우회적이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분께서 땅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는 믿음 때문에
하느님 대신 하늘, 땅을 두고 맹세했던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들의 전매특허인 ‘맹세’를 밥먹듯이 되풀이하는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절대 진실’을 요구하셨습니다.
그 결과 절대로 맹세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맹세는 대체로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입니다.
누군가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을 제발 믿어달라는 의도에서 맹세를 내세웠습니다.

유다인들은 맹세를 즐겼는데, 맹세를 할 때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대신 성전의 금(금촛대, 금속죄판, 금화)이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유효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많은 사이비 지도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한 신앙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맹세’라는 극단적인 도구의 통용보다는, 상호간에 자주 오고가는 신뢰와 우애, 나눔과 소통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