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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3월29일 [사순 제5주일]

슬픔 중에서 가장 깊은 슬픔은 아마도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일 것입니다. 멀쩡하고 든든하던 아들, 여러 자녀들 가운데서도 가장 다정다감하던 아들, 나이 드셔서 그나마 가장 큰 낙(樂)이요, 유일한 의지처였던 효자를 잃고 슬퍼하는 한 자매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들을 앞세웠다는 죄책감과 상심으로 자매님 일상생활은 거의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득 채워진 쓰레기봉투를 내다버리러 나가다가도 갑자기 아들 생각이 나면 슬픔에 겨워 주저앉아 우십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쓰레기봉투를 냉장고에 넣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아들 없는 이 세상, 어머니에게 더 이상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국적 연합군처럼 포위해오던 갖은 과로와 스트레스, 중압감을 견디다 못해 건강에 과부하가 걸린 것도 모르고, 한번 잘 살아보겠다고 죽기살기로 뛰어다니던 아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한 순간에 세상을 하직한 아들의 얼굴이 생각날 때 마다 자매님은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한 인생이 제대로 활짝 펴보지도 못한 채 요절한다는 것은 너무도 잔혹한 일이지요. 특히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오빠 라자로를 먼저 떠나보내고 애통해 하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슬픔을 보십니다. 먼저 떠난 라자로는 예수님에게도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오랜 시간 동고동락을 같이 했던 절친한 친구 같은 존재였습니다. 친구 라자로의 부재에 예수님께서도 눈물흘리십니다.

오빠와 사별로 인해 망연자실해 있는 마리아와 마르타를 바라보는 예수님 눈망울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입니다. 기운이 하나도 없이 겨우 서 있던 자매를 바라보던 예수님 마음 역시 찢어질 듯이 아파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향해 생명의 말, 구원의 말 한마디를 던지십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오늘 라자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결핍, 우리의 나약함은 하느님의 자비를 요청하는 원동력입니다. 우리의 고통, 우리의 상처는 하느님의 사랑을 불러오는 바탕입니다. 우리의 슬픔, 우리의 눈물은 하느님의 구원을 가져다 주는 도구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우리 감정을 하느님 앞에 감추지 않고 솔직히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자신의 한계와 비참함을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고 그분의 손길, 그분의 도움을 간청하는 자세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 아주 소중한 요소입니다.

때로 하느님 앞에 울고 싶을 때는 원 없이 우는 것도 필요합니다. 너무도 충격적 일 앞에서 “하느님 당신이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을 다 겪게 하십니까?” 하고 외치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런 일입니다.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따지면서 “도대체 이게 뭐냐”고, “제발 좀 길을 열어주시라”고 간청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너무나 울어 눈물조차 말라버렸을 때, 목소리가 잠겨올 무렵, 가만히 뒤에서 우리 어깨를 감싸주실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 눈에서 영원히 눈물을 거두어가실 분, 결국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떠나야 할 존재란 것을 깨우쳐 주실 분, 이 세상 그 누구도 주지 못할 따듯한 위로를 주실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음산하고 어두운 죽음의 장소인 무덤을 향해 이렇게 외치십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라자로야, 그대 자신을 옥죄고 있는 죄와 악습의 사슬을 끊고 나오너라!”
“라자로야, 그대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살아왔던 질병과 죽음의 굴레를 던져버리고 나오너라!”

온 몸을 뒤덮고 있는 더러워진 수의를 그대로 걸친 라자로는 비틀비틀거리면서 겨우겨우 동굴 밖으로 걸어나옵니다. 심연의 죽음을 떨치고, 질식할 것만 같은 짙은 어둠을 뒤로 하고 걸어나옵니다.

죽었던 라자로의 소생 기사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활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결정권을 쥐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란 사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욱 기쁜 일은 예수님께서는 먼 훗날 우리 생이 마감하는 그 순간, 우리를 부활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