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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속적으로 숙고되고 성찰되지 않은 배움의 결말은 비참할 뿐입니다!

3월28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예수님을 보고 예언자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메시아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조금 특별한 유랑 설교가라고 하는가 하면, 사기꾼이요 사이비 교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종합해 보니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어집니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 그분께서 메시아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오랜 속박에서 해방시켜주실 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으로 인정하며,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리가 없지 않은가?”(요한 복음 7장 41절)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잘 나가던 사람들이 대놓고 무시하고 경멸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방끈이 짧다고 저주받던 못배운 군중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배척하고 박해하던 이들은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요 석학들이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 최고 의회 의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과 율법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 뭐합니까? 결국 그들이 목숨걸고 배운 바가 그들 앞길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숙고되고 성찰되지 않은 배움의 결말은 비참할 뿐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다시 ‘그 잘난’ 명함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어떤 후보의 명함을 보면 깜짝 놀라지 않을 없습니다. 그 좁은 공간 안에 별의 별것 들이 다 적혀 있습니다. 웬만한 이력서 저리가라 입니다. 엄청난 학벌과 화려한 이력 앞에 입을 다물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고 환한 미소로 깊이 고개를 숙이며, 한다는 말은‘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 국민의 충복(忠僕)이 되겠다.’입니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신과 변절을 밥먹듯 합니다. 국민은 하나도 바라보지 않고 자신만 바라봅니다. 국민의 충복은 무슨? 국민은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름 배웠다는 사람들이 더 그렇습니다. 나름 엘리트 집단의 최고봉까지 올라갔던 사람들이 더 그렇습니다. 공인으로서의 품위나 성숙도는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이 너무나 유치해서 차마 봐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비참함과 추함은 노력의 부족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이 세상 앞에서 부단히 고민하고 성찰해야 마땅합니다. 정확한 식별을 위한 기도와 연구가 필요합니다.

다시금 촉각을 곤두세우고 유심히 바라봐야겠습니다. 우리들뿐이 아니라 주님 보시기에도 혐오스럽고 심기가 불편해지는 위선이나 이중성, 허세와 거짓, 천박함의 끝판왕, 언행 불일치의 인물은 어떤 사람인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 진실성과 진정성을 갖춘 사람, 품위와 언행일치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게 너무 지나친 기대라면, 적어도 기본과 상식이라도 갖춘 사람,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나 도덕성을 갖춘 사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