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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러한 재난과 시련의 시기는 성찰과 성숙의 때이기도 합니다!

3월22일 [사순 제4주일]

우리 민족은 물론 인류 공동체 전체를 위협하는 대재난 앞에서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하느님께서는 이 대재앙을 통해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

전지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류 전체가 겪는 이 극심한 고통 앞에 왜 신속하게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아무리 곱씹고 또 곱씹어도, 아무리 묵상하고 또 묵상해도, 납득할만한 명쾌한 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종교 지도자는 하느님께서 진노하신 결과라고, 그에 따른 징벌을 내리셨다고 외치는데,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입니다.
괜히 별 생각없이 엉뚱한 말했다가 비난의 대상, 공공의 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라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 본연의 나약함과 한계를 자각하고 더 겸손해지라는 메시지.
지구촌 전체를 위협하는 다양한 형태의 거대악과 재난, 질병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서로가 더 연대하고 협력하라는 메시지.
평소 잊고 살았던 가장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깨달으라는 메시지 말입니다.

지난 성 요셉 대축일에 배포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이러한 재난과 시련의 시기는 성찰과 성숙의 때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시지만 동시에 시련을 이겨 낼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1코린 10,13).

오늘 예수님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시어
앞을 보게 하시는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오늘 이 시대 역시 저 자신을 포함해서 만사 제쳐두고 실로암 연못으로 달려가야 할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죽었다 깨어나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평소 같으면 수많은 교우들로 붐빌 텅빈 성전,
평소 같으면 수많은 아이들로 요란스러웠을 텅빈 교정, 텅빈 수련원 경당에 앉아, 늦었지만 절실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습니다.

평소 별 생각 없이 대하던 교우 한분 한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송이 꽃이었다는 것을.
아이들 한명 한명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값진 보물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눈만 뜨면, 만날 때 마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존재 자체로 선물이요 축복인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교회의 가장 기본 세포요 조직인 교우들이 사라진 본당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이 사라진 교실은 그저 황량한 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태가 진정되고 정상화되는 어느 날, 한분 한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답답하고 제한적인 삶을 시작한지 꽤 많은 날들이 지났습니다.
짧다고 하면 짧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날들,
우리는 그간 단 한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초유의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흘러넘치도록 풍성했던 날들, 하고 싶은 것은 뭐든 다 할 수 있었던 날들을 돌아봅니다.
자신도 모르게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에 깊이 함몰되어 살았음을 반성합니다.

내 삶 안에 하느님의 영역, 신앙의 영역, 영적인 영역은 한없이 초라하게 위축되고, 인간의 영역, 세상의 영역은 괴물처럼 확장되었음을 성찰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기, 볼 줄 아는 눈이 없어 그간 놓치며 살아왔던 일상의 지극히 작은 것들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