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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님, 간절히 청하오니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2월19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서너살 된 아이들은 무서울 때 꼭 눈을 감습니다. 그때 엄마는 아이를 가슴에 꼭 안아주고, ‘괜찮다’며 등을 두드려줍니다.

그런 엄마의 위로와 격려에 힘입어 아이는 다시 눈을 살짝 뜹니다. 공포는 조금씩 사라지고 현실을 직면하는 능력을 키우게 됩니다.

사람들이 한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치유의 은총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예수님의 반응과 태도가 특별합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치유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려 나가십니다.

본격적인 치유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그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함께 걸으면서, 그와 친밀해지는 시간을 갖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십니다.

침을 바르시고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는 예수님 시대 당시 치유자들이 사용했던 전형적인 모션이었습니다. 이날 치유는 한번에 이루어 진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환자의 증세가 얼마나 중증이었던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가련한 인간을 향해 보여주시는 친밀함이 유난히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안그래도 계속 밀려드는 군중으로 인해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바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냥 말 한마디면 치유가 가능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측은한 인간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동행해주시고, 따뜻한 스킨십을 나누시고, 배려해주시고, 사랑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배려에 눈먼 사람은 큰 용기를 얻습니다. 오랜 세월 지니고 살아왔던 두려움과 낙담, 외로움과 서러움이 눈녹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영적인 치유, 마음의 치유, 전인적인 치유의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창조주이시며 삼라만상을 지배하시는 만왕의 왕 하느님께서 한없이 부족하고 부당한 죄인, 두려움에 떠는 한 나약한 인간과 일대일로 접촉하시는 모습, 참으로 은혜롭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니 사목이란 양떼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측면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지니고 살아가는 일상적인 고통과 깊은 상처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이 사목이 아닐까요?

같은 처지의 인간으로서 뭐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함께 아파하고, 그저 함께 있어주고, 그저 함께 동행해주는 일, 그저 함께 울어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참된 사목이 아닐까요?

벳사이다는 ‘어부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벳사이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필립보의 고향이었습니다. 이 마을은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요르단 강의 하구 동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분봉왕 필립보는 이 마을을 도읍으로 승격시켜 아우구스토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이 마을을 황제의 딸 이름인 유리아하고 불렀습니다.

사실 벳사이다에는 그 눈먼 이 한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눈먼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도들이었고, 어쩌면 오늘 우리들입니다. 영적으로 눈먼 이들 말입니다.

줄곧 예수님 곁에 머물며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행하시는 기적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눈먼 사람이나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겸손하게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주님, 간절히 청하오니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볼 수 있는 눈을 주십시오. 그냥 눈이 아니라 혜안(慧眼), 영안(靈眼)을 제게 주십시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