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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광주지역 협력자 사순피정 강의 (최성규 레오 신부님)-3월 4일

광주지역 협력자 사순피정 강의

(요한10장11절에 대한 성서 해석과 2012년 생활지표 설명)

(강의 1부)

말씀은 우리 신앙을 지탱하는 거대한 두 기둥 중에 하나입니다. 두 기둥이라 함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성전과 성서입니다. 성전은 교회의 거룩한 전통으로 대표적인 것으로 7성사와 준성사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톨릭 교회는 성전에 대한 비중만을 많이 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전례의 핵심인 미사 성제를 보더라도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되었듯이 성서 또한 신앙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교회는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오해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입니까? 말씀 드렸다시피 모두가 말씀에 대한 열정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서를 우리 삶 안에서 더 편하게 접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서가 어렵다는 선입견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솔직히 고백합니다. 성서가 어려운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다르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말 맞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성서를 사랑하면 성서를 공부하게 되고 그 결과로 더 알게 되고 그 순간부터는 성서 안에서 보이는 것은 예전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로 여러분이 우리 생활 안에서 전례력을 이해한다면 교회의 전례신비에 더 깊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례력설명)

말씀이 우리 삶 안에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읽고 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담고 있는 참 다운 의미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는 교회 안에서 유행하는 성서통독이나 필사 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서에 많은 관심을 갖기 위한 좋은 방법이지만 큰 위험성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서에 대한 공부 없이 단순히 통독이나 필사 등을 실시 하면 우리는 금방 지치거나 싫증을 내고 성서를 더욱 멀리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의무로 하는 성서 필사는 하루하루 밀리기 시작 하다 보면 밀린 것에 대한 부담으로 중도에 포기하고 성서를 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한 번을 읽더라도 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와 함께 병행 할 때 우리는 성서의 참 맛을 알고 자연스레 성서를 가까이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성서에 관한 지식적인 수업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본 강의인 요한 10장 11절의 성서적 고찰과 그에 따른 살레시오가족 생활지표에 관한 강의에 앞서 크게 두 가지 것을 먼저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성서를 이해하는 방법 몇 가지는 함께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성서 주석방법입니다. 성서를 읽는 방법론은 그 차이에 따라 해석이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강의의 주제인 요한 10장 11절을 포함하는 요한 복음의 전체적인 개괄을 하고자 합니다. (시간상 생략가능)

이 모든 것들은 오늘 강의의 주제인 요한 복음10장11절에서 말하는 착한 목자상에 대한 이해와 2012년 살레시오가족생활지표에 대한 참 이해를 위한 준비작업이 되는 것입니다.

(성서의 올바른 이해)

우리는 성서를 무리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문자 그대로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발생하는 수 많은 신앙적 문제, 심지어 사회적 문제로 까지 확산된 경우를 경험했다. 이는 앞에서도 거론한 것과 같이 성서는 단순히 인간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인간이 작성한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를 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제시하는 올바른 성서해석법을 익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건이 된다. 올바른 성서해석법을 공부하는 것을 우리는 보통 성서주석학이라고 한다.

 성서주석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역사비평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비평방법이다. 물론 성서주석을 세분화 한다면 수 많은 방법을 발견하게 되지만 보편적으로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포괄적으로 구분하게 된다.

1)    역사비평

-근, 현대 200년간 성서해석을 주도한 방법

-성서의 본문 뒷면의 세계를 연구하는 방법

-그 예로 원전비평, 역사비평, 출전비평, 양식비평, 전승비평, 편집비평 등

2)    문학비평

-1960년대부터 대두되어 1980년대까지 절정을 이루며 오늘날 성서해석을 주도한 방법

-성서의 본문 안의 세계와 본문 앞의 세계를 연구하는 방법

-구조주의 비평, 서술비평, 설화비평, 수사학적 비평, 이념 비평 등

 이 같은 연구방법은 성서의 특성 때문인데 그 특성은 성서 본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성서는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문자적 의미(literal sense): 성서 본문이 보여주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말한다. 이런 문자적 의미는 근본주의적 해석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 근본주의적 해석은 1700-1800년대에 활발하게 사용된 방법이다. 많은 경우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방하지만, 다른 많은 경우 성서 본문을 현실에 삶에 글자 그대로 적용했을 때 반인간적, 반윤리적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2)    문학적 의미(literary sense): 성서 저자가 본문을 쓰면서 거기에 담아 놓은 의미를 말한다. 문학적 의미는 역사비평적 해석과 문학비평적 해석을 통해서 드러난다.

3)    영적 의미(spiritual sense): 영적 의미는 거룩한 독서를 통해서 드러난다. 거룩한 독서란 독자가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오늘 이 자리의 삶과 연결하여 읽는 것을 말한다.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거론한 두 가지 해석 방법을 통해 성서 안에 담긴 세 가지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 본문의 세 가지 의미를 구체적 예를 들어 고찰해 보자. 레위 17장 14절에 보면 “너희는 어떤 생물의 피도 먹어서는 안 된다. 피는 곧 모든 생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라는 규정이 나온다 (참조: 창세 9장4절; 사도행전 15장20절). 이 구절의 문자적 의미는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 일부 사이비 그리스도교 종파의 근본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일체의 수혈을 거부한다. 심지어 교통사고를 당한 중환자 가족에게조차 수혈을 못하게 함으로써 목숨을 잃게 한 예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쓴 저자의 의도는 단순히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레위기 17장에도 나와 있듯이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함부로 해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역사비평적 방법과 문학비평적 방법을 통한 성서해석이 필요하다.

 고대인들은 사람이나 짐승이 피를 다 쏟고 나면 죽는 것을 보고 피와 목숨을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피를 먹는 것은 목숨을 탈취하는 행위와 다름 없었다. 하지만 근본주의적 해석에 바탕을 둔 수혈거부는, 문자적 의미는 충족시켰을지는 몰라도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저자의 의도에는 역행한 결과가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문자적 의미와 문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이 둘이 충돌할 때는 문자적 의미보다 문학적 의미를 선호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문학적 의미에 만족하지 말고 성령의 도움을 청하며 영적 의미로 나아가야 한다. 대부분 문자적 의미와 문학적 의미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반면, 영적 의미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다. 앞의 구절에서 문자적 의미와 문학적 의미는 “피를 먹지 말고 생명체의 목숨을 해치지 마라” 이지만, 영적 의미는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라”이다.

 독자는 이처럼 거룩한 독서를 통하여 일상의 삶 안에서 어떻게 하면 만연된 죽음의 문화에 맞서 생명의 문화를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함께 이 피정에서 요한10장11절에 대한 주석법은 설화비평이 되어야 합니다. 성서는 여러 가지의 설화로 구성된 하나의 문학 작품입니다. 기존의 방법인 역사비평은 말씀 드렸다시피 설화 이면의 세계에 시선을 가져갔다면 설화비평은 텍스트 이면이 아니라 그 앞에 그리고 그 안에서 독자는 구체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설화의 내용에 우리도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를 전문 용어로 내재적 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 이야기를 통해 복음서의 저자는 우리 각자에게 대화를 걸어오는 것이고 그 설화는 이제 2000년 전 일어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나와 연관된 내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며, 그 안에서는 생생한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독서의 시작입니다.

(요한 복음의 이해)

두 번째로 요한 복음의 이해입니다. 공관 복음이 예수님의 지상 생애와 가르침을 전하는 기록이라면, 요한 복음은 그분의 정체와 구원 활동과 가르침에 대한 원숙한 신학적 반성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반성은 개인과 공동체가 구원을 받는 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구원은 이제 요한 복음에서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과 동의어이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공관 복음의 ‘하느님 나라’를 대체한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요한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 개념은 요한 복음의 핵심 주제 다섯을 관통한다.

A.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하느님과 함께 한처음부터 선재하신 말씀으로 계시한다. 공관 복음이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 초점을 맞추는 데 반하여 요한 복음은 지상 생애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까지 폭넓게 언급한다. 요한 예수님께 부여한 칭호들은 말씀, 하느님, 주님, 그리스도, 메시아 이스라엘의 임금,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 예언자, 사람의 아들 등 여러 가지다. 이중 요한 복음의 고유한 신학 사상과 직결된 칭호는 ‘말씀’이다.

B.   요한 복음의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신다. 마르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을 되도록 감추려고 한 공관 복음의 예수님과는 달리 요한 복음의 예수님은 처음부터 당신의 정체와 신분을 명백하게 밝히신다. 그 형식은 ‘에고 에이미’ 정식이다. 우리말의 뜻은 ‘나는…이다’ 또는 ‘나는 있다’가 된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 정식을 보어와 더불어 쓰이는 경우는 많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들의 문이다’(10:7), ‘나는 착한 목자이다’(10: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포도나무이다’(15:1, 15). 요한 복음에서 단독으로 쓰이고 있는 ‘에고 에이미’는 요한 8장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의 영원한 실존에 참여하신다는 예수님의 주장을 반영한다.

C.   예수님은 생명을 지니시고 전달하신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정체와 활동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은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일 것이다. 생명을 주고 생명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일이요 예수님의 일이다. 이 생명은 요한 복음에서 ‘구원’과 서로 바꿔 쓸 수 있다. 또한 요한 복음의 ‘영원한 생명’은 공관복음의 ‘하느님 나라’를 대신하는 개념이다.

D.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은 실체를 가리키는 표징이다. 요한 복음의 표징은 실체를 따로 두고 그 실체를 설명하거나 그 실체에 접근하기 위하여 도움을 주는 표시다. 요한 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 많은 기적 가운데 의도적으로 이 일곱 가지 표징만을 골라 소개하였다.

E.    성령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세상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를 증언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신약성서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파라클레토스’는 모두 요한 복음에만 나오고 요한 복음 말고는 1요한 2:1에 단 한 번 나오는데, 성령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의미는 ‘조력자’, ‘위로자’, ‘중개자’, ‘보호자’, ‘협조자’ 등이다. 파라클레토스 성령의 역할은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세상과 연관 되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과 연관된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으시는 한편, 진리의 영으로 제자들에게 오셔서 스승으로 증언해 주시고 그들을 진리 안으로 이끄신다. 요한 복음에서 진리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리킨다

전체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요한 복음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곧 ‘표징의 책’이라 불리는 전반부(1:19-12:50)와 ‘영광의 책’이라 불리는 후반부(13-20장)이다. 그리고 이 두 책 앞뒤에는 머리말과 맺음말이 덧붙여 있다.

먼저 표징의 책(1:19-12:50)에는 일곱 가지 표징을 중심으로 이야기와 담화가 펼쳐진다. 그 표징은 물을 술로 변화시키심(2:1-11),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심(4:46-54), 벳자타 못가의 병자를 고치심(5:1-9),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심(6:1-13), 물 위를 걸으심(6:16-21),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심(9장),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11:1-44), 이렇게 일곱이다. 잘 알다시피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뜻하는 상징수다. 표징과 더불어 유다인들의 주요 축제들을 적절하게 배열하고 예수님의 신원과 가르침을 계시하는데 그것들을 이용한다. 축제의 기본인 안식일은 5장에, 과월절은 6장에, 초막절은 7장1절에서 10장 21절에, 봉헌절은 10장 22절에서 42절에, 그리고 다시 마지막 과월절은 11장에서 12장에 할애한다.

후반부 영광의 책(13장-20장)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다룬다. 표징의 책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자주 말씀 하신다. 그러나 13장부터는 그때가 왔다고 하신다. 그때란 표징이 가리키는 실체가 드러나게 되는 때를 말한다. 여기서 실체란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을 말한다.

후반부는 크게 고별예식(13장-17장)과 죽음, 부활사화(18장-20장)으로 나눈다. 21장은 맺음말이다. 요한 복음은 본디20장으로 끝나고 21장은 저자나 후대의 편집자가 나중에 덧붙인 것으로 추정한다.

(강의 2부)

지금부터 본 강의로 들어가겠습니다. 올해 생활지표에 주제가 되는 참된 목자상은 단지 올 한해 생활지표의 주제일 뿐 아니라 모든 살레시안들의 참된 살레시안상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혹시 살레시안들의 종신서원 메달을 아시나요? 우리는 그 메달을 착한목자메달이라고 합니다. 그 메달의 앞면에 바로 목자가 양을 짊어지고 있는 착한 목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착한 목자상은 살레시안들에게 매우 중요한 참된 영적인 모델이 됩니다. 여기에 계시는 협력자들도 살레시안임으로 여러분들 역시 이 착한 목자상은 여러분 모두가 닮아가야 하는 참된 모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총장님께서는 단지 SDB가 아닌 살레시오 가족 모두에게 함께 성취해야 할 참 살레시안의 모습으로 올 해Strena인 참된 목자상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럼 여기서 올해 생활가족생활지표를 상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받친다” (요한 10장 11절). 돈보스코를 배우고 닮아, 청소년을 우리 삶의 사명으로 삼읍시다. 올해 생활지표는2015년 돈보스코 탄생 200주년을 준비하는 첫 해로 돈보스코를 알아가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돈보스코를 잘아는 것과 착한 목자는 어떤 연관이 있기에 착한 목자상과 연관시켜서 우리에게 제시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살레시안이라면 누구나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착한목자의 모습을 가장 잘 실현하신 분이 바로 돈보스코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수 많은 착한목자의 모습을 실현한 성인들이 많습니다. 그분들과 돈보스코가 다른 것은 바로 사목의 대상인 양들이 젊은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향한 사랑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살레시안입니다. 그렇다면 착한목자 특히 돈보스코가 보여준 참된 목자상은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가장 좋은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이해하거나 공부할 때 그 대상의 뿌리가 되는 것을 공부하거나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대상을 심도 있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즉 돈보스코의 참된 목자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참된 목자의 모습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없이는 깊이 있는 참된 목자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총장님은 가족생활지표를 주시면서 그 생활지표의 근거를 복음서의 예수님의 모습과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본격적으로 목자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알아봅시다. 먼저 구약 안에서의 착한 목자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묘사하는데 사용한 목자의 상징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오리엔트에서 왕은 자기를 신이 임명한 목자로 묘사합니다. “방목” 혹은 “사목”은 왕의 통치 임무를 가리키는 한 상징입니다. 약자를 돌보는 것은 이 상징 안에서 의로운 통치자의 임무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원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가 착한 목자라는 상징은 그리스도가 왕이라는 복음이며 이 상징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밝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목자 상징의 직접적인 전사는 하느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목자로 나타나는 구약성경입니다. 이 상징은 유다 민족의 신앙심에 깊이 각인되어 있으며 특히 유다 민족이 힘들었던 시기에 위로와 신뢰를 안겨주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 신뢰의 신앙심을 가장 아름답게 요약한 것은 아마도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노래한 시편 23번입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목자라는 상징을 더욱 크게 발전시킨 것은 에제키엘서 34장에서 37장입니다. 공관복음서의 목자 비유들과 요한 복음서의 목자 설교는 에제키엘의 이 이상을 구체적인 현재 속으로 끌어올려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의 예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약에서 예언한 목자상이 예수님의 복음선포와 활동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에제키엘은 당시의 이기적인 목자들을 비난하면서 하느님이 몸소 그의 양 때를 찾고 돌볼 것이라는 약속을 선포합니다. “그들을 민족들에게서 데려 내오고 여러 나라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버리겠다.” (34:13,15-16)

이러한 예언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어떤 모습으로 실현 되어질까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투덜거리자 주님은 집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 양과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이 양을 찾아 나선 목자는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기쁨에 넘쳐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그의 적대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에제키엘서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읽지 못했느냐? 나는 그저 참된 목자 하느님께서 예고한 것을 할 뿐이다.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려고 한다.” (목자의 현재상)

목자 상징의 묘사는 구약성서의 후기 예언에서 한 번 더 놀랍고도 뜻 깊은 전환을 맞이하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로 바로 이어지게 됩니다. 마태오의 보고에 따르면 예수님은 최후의 마찬을 마치고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면서 즈가리야서13장7절에 나오는 예언이 이제 이루어질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 (마태26장31절) 실제로 즈가리야서 이 구절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죽음을 달게 받아들여 마지막 전환을 끌어들이는 목자의 미래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목자의 미래상)

이렇게 해서 구약을 통해 이미 예언되고 실현된 착한 목자상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성서 본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요한 복음에서 목자와 양에 관한 설교는 10장1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착한목자에 대한 구절은 바로 10장 7절에서 18절까지의 내용이 됩니다. 비록 우리에게 올해 생활지표로 주어진 성서적 근거는 10장 11절에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라는 구절이지만 실상 착한 목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10장7절부터 18절까지 좀 더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10장7절부터 18절까지 읽기)

착한 목자에 대한 담론자체는 네 번 반복되는 “나는 … 이다”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이는 착한 목자에 관한 담론을 네 가지 주제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에 대한 설교 자체는 뜻밖에도 “나는 착한 목자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상징으로 시작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10장7절).” 이에 대한 정의는 앞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1-2절)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들의 문으로 정의하신 첫 번째 해석은 아마도 여기서 당신께서 아버지에게 올라가신 뒤에 자기 양 떼를 돌볼 목자들의 자격을 정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목자인지는 그가 예수라는 문으로 들어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예수님을 따르는 사목자라면 예수라는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착한 목자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라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요한 복음 21장의 후기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목자 지위에 임명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세 번에 걸쳐 말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오라.” (21장15-17절) 베드로는 아주 분명히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목자로 정해지고 예수님의 목자 지위에 임명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 자신이 먼저 “문”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이 들어감을, 더 정확히는 이 문으로 들어가도록 허락받음을 (10장3절)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자신과 하나 되게 해주는 사랑에 대해 묻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맡겨진 양떼를 치기 위해서 혹은 착한 목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일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이 일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깨닫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통해’ 양들에게 다가오며 시몬 베드로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 떼’로서 이들을 맡습니다. 그는 예수라는 문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사랑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다가오기 때문에 양들은 그의 말을, 곧 예수 자신의 말을 듣습니다. 결국 양들은 시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시몬과 한 몸이자 시몬이 들어온 문인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오직 예수님만이 궁극적으로 목자이며 오직 예수님만이 양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착한 목자는 진정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양을 치는 목자 입니다. 즉 사목은 결국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한번 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일 혹은 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사목자입니다. 살레시안들은 더욱 구체적으로 젊은이들이라는 양을 치는 목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사목자 하면 사제만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보편적 사제직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사실로 우리는 참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묵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편적인 모델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미 성서를 통해 알아봤습니다.

이제 우리는 좀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살레시안을 위한 착한 목자를 묵상해 봅니다. 바로 돈보스코입니다. 이런 의도 하에 총장님께서는 2012년 생활지표로 돈보스코를 배우고 닮아, 청소년을 우리 삶의 사명으로 삼자고 초대하십니다.

총장님께서 주신 특별한 모델인 돈보스코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과한 사목자입니다. 그분은 예수님과 특별한 사목적 열성으로 일치한 분이셨습니다. 바로 젊은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돈보스코는 누구보다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뜻을 알고자 노력했고 결국 그분의 뜻을 위해 활동하신 사목자이십니다. 그에 대한 증거는 돈보스코의 사랑을 통해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돈보스코는 예수님을 대리한 참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발견합니다. 젊은이들의 참다운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두 가지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돈보스코라는 문을 통과하는 것이고 하나는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총장님께서 말씀하신 돈보스코를 배우고 닮기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총장님 말씀처럼 우리가 돈보스코를 알지 못하고 그분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영적 여정과 사목적 결정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불어 살레시안의 신원은 돈보스코의 이미지와 직접 결부되어 있습니다. 즉 그분 안에서 우리의 신원이 드러나며 믿을 만한 것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깨우치고 드러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결국 돈보스코를 배우고 닮아가려는 노력은 청소년들을 우리 삶의 사명으로 삼기 위한 자격요건 혹은 전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의 두번째 대목에 가서야 비로소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0장11절)라는 핵심 정의가 나옵니다. 이는 목자가 자신의 양들에 대한 철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더불어 하나의 새로운 사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들의 수난과 죽음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로 당신의 죽음을 암시하십니다. 결국 착한 목자설교의 중심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인간의 가장 심각한 위협은 사랑의 결핍에 있으며, 이런 병들고 상처 입은 체험을 계속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단죄하며, 차갑고 경직된 사람이 되고, 결국에 공허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바로 이때 그에게는 사랑의 결핍이라는 죽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를 지탱해 주고 돌보아 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착한 목자의 사랑은 청소년들을 향한 돈보스코의 사목적 열정과 사랑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목적 사랑은 돈보스코의 역사 전체의 독특한 특징을 부여하며, 다양한 사업의 정신이 됩니다. 우리는 그것이 그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돈보스코 카리스마의 가장 큰 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그분 안에 머물면서 그분께로부터 직접 이끌어 낸 사랑 안에 있습니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주는”데에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돈보스코와 우리 살레시안들의 사도적 서약이 나옵니다. 나는 가난한 젊은이들을 위하여 나의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자신을 바치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했다” (돈보스코 전기 18권 258쪽, 살레시오 회헌 1조).

이러한 사목적 사랑은 돈보스코를 배우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인간들 혹은 많은 젊은이들의 심각한 위협은 사랑의 결핍이요 이러한 위협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모토의 중요성을 상기합니다.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랑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시오”

총장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젊은이들의 요구와 요청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살레시오 가족 구성원 각자에게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부탁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산다는 것은 활동을 위한 헛된 활동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마음을 자기 양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잃고 싶지 않은 착한 목자의 마음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인간적이고 영적인 사명입니다. 그것은 고행의 길입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의 삶을 풍성하게 해 주기 위해 우리는 뭔가를 잃는 것, 아니 어찌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바로 우리의 헌신과 우리의 투신을 지탱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 ‘돈보스코를 배우고 닮자’ 라는 말은 그의 사목적 열성과 사랑을 본받자 라는 구체적인 초대가 됩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은 돈보스코가 젊은이들을 향한 투신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투신을 위해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돈보스코를 배우고 닮기 위해 돈보스코를 아는 것이고 그 다음은 투신할 젊은이들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이는 착한 목자 설교의 세 번째 대목과 일치합니다.

목자 설교에서 중요한 세 번째 주제는 목자와 양 떼가 서로를 안다는 것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0장 14절-15절) 이 구절들에서는 서로 얽힌 두 사상이 눈에 띄는데, ‘안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이것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안다는 것과 자기 양들이라는 것은 서로 얽혀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이 자기 것이기 때문에 양들을 압니다. 그리고 양들도 목자의 양들이기 때문에 목자를 압니다. 이는 예수님과 당신의 양들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어 원본을 보면 ‘게호렌’ 이라는 ‘안다’라는 동사가 ‘타이디어’ 즉 ‘자기의 것’이라는 뜻과 같이 사용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안다는 것과 자기의 것이라는 것은 원래 같은 것입니다.

참된 목자는 쓰고 버리는 물건처럼 양들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양들은 목자와 서로 안다는 의미에서 목자의 것입니다. 이렇게 ‘안다’는 것은 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이것은 물건을 소유한다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니는 내적 귀속을 의미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인간은 물건처럼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닙니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고 부부는 서로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컨대 나무토막이나 특정 토지나 그 밖에 ‘소유물’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보다 훨씬 깊은 방식으로 서로에게 속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속하지만 그 자체로 자유로운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각자 자기만의 소명을 지니고 있으며 하느님 앞에서 자기만의 새로움과 독특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책임 속에서 서로에게 속해있습니다. 이들은 서로의 자유를 받아들이고 사랑과 앎 속에서 서로를 떠받침으로써 서로에게 속해 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함께 있음으로써 영원히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하나입니다.

이것은 강도나 도둑이 양들을 물건처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과 다릅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목자와 강도의 차이입니다. 강도에게 혹은 독재자에게 인간은 그저 소유의 대상이 되는 물건일 뿐입니다. 그러나 참된 목자에게 인간은 진리와 사랑을 향해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참된 목자인 까닭은 그분께서 우리를 알고 사랑하면서 우리가 진리의 자유 속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한 구절 더 주목해야 한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0장 14-15절)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아는 것은 목자와 양들이 서로를 아는 것과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과 그의 양들을 결합하는 이 앎은 예수님과 아버지가 서로를 알면서 하나인 것의 내부에 위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앎의 신비를 살레시안들에게 적용해 봅니다. 살레시안들에게 앎의 대상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먼저 돈보스코입니다. 우리가 돈보스코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돈보스코와 관계 뿐만 아니라 돈보스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까지도 맺을 수 있습니다.

돈보스코를 알고 배우는 것은 이미 서론에서 거론하였듯이 우리의 신원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즉 그분 안에서 우리의 신원이 명확해지고 믿을 만한 것이 됩니다. 또한 돈스코를 알고 배운다는 것은 돈보스코에게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준 사명에 충실하다는 의미입니다. 돈보스코에게 충실하다는 것은 그분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또 그분 시대의 역사 속에서 그분을 알고, 그분의 영감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그분의 동기와 선택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가 우리에게 준 사명에 충실하다는 것은 우리 자신 안에 젊은이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가꾼다는 것을, 부단하고 강한 사랑을 가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돈보스코 선종 100주년, 수도회 창립 150주년, 그분의 탄생200주년을 맞아 총장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 번째 준비과제로 돈보스코를 알고 배우는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는 그분과의 영적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끈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총장님께서는 중요한 한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 돈보스코를 알고 배우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과거 역사에 대한 학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보스코를 알고 배운다는 것은 과거 역사의 현재화라고 총장님은 말씀하십니다. 좀더 쉽게 말한다면 돈보스코의 현대적 재해석을 의미합니다. 변화하는 역사적 시대에 우리의 카리스마가 성장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창립 카리스마가 ‘귀한화석’으로 머물러 있지 말고 ‘활발히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현대적으로 어색하게 만들어진 교회의 성인전들을 봅니다. 그러한 성인전들을 읽게 되면 성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보다는 우리와 존재 자체가 다른 그 어떤 괴리감을 갖게 합니다. 이는 성인전을 출판하면서 갖는 목표와는 다른 결과입니다. 당시에 성인들도 인간이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였기에 그들은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 교회는 당시 시대적 요구에 의해 상당히 호교론적이며 과장을 섞어가면서 성인전을 출판했습니다. 그 책을 접하는 순간 독자가 느끼는 감정이 괴리감이나 허무함 혹은 의구심이라면 우리는 현대 사회에 요구에 부응하는 건강한 식별과정을 마친 성인전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총장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떤 성인이 어떤 약점을 지녔다면,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성인들의 결점을 드러내는 것으로 세 가지의 이득을 얻습니다. 즉, 역사의 정확성을 존중하게 되며, 하느님의 절대성을 강조함으로써 투박한 질그릇인 우리가 용기를 얻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위한 영웅에게도 피는 물이 아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앎의 신비의 대상은 바로 젊은이입니다. 앎의 신비가 주는 관계의 신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알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착한 목자가 돈보스코라면 우리가 알아야 할 양은 바로 젊은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현대의 젊은이들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새로운 실존 방식 즉 디지털화 되어 있는 사회구조와 현상 그리고 이러한 문명 안에 새로운 주인공으로 떠오른 세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기성세대들의 이해의 폭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X세대 / 이러한 X세대에 더 낮아진 연령층으로 소비주체로 이야기 되어지는 Y세대 / 네트워크 중심의 소통과 네트워크 중심의 일상이 중심이 되어 버렸다 해서 N세대 / 월드컵 거리 응원 문화의 주체 W세대 / 그리고 참여 열정 힘으로 규정지어지는 P세대까지 젊은 세대는 계속해서 세포 분열을 하고 있습니다.

돈보스코를 알고 배운다는 것이 역사적 돈보스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현재화시키는 작업이라면 젊은이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대적 요청에 가장 민감한 존재가 젊은이들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그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야 합니다. 이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현존하지 못하게 되고, 그들과의 관계 형성에 실패하고 결국 우리는 우리의 카리스마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수도회 존폐와 연관 되어 있습니다. 좀더 쉬운 살레시오 영성적 표현을 빌리자면,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젊은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사랑하는지 또한 근본적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그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을 안다는 것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이지 그들을 속박하고 소유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러한 앎의 최종목표는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해 일하는 목자들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목자와 그에게 맡겨진 ‘양들’을 결합하는 서로에 대한 앎이란 서로를 하느님 안으로 끌어당기고 서로를 하느님에게 이끄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해 일하는 목자는 다른 사람이 그의 완전한 자유를 찾도록 언제나 자기 너머에 계시는 예수님께 그를 이끌어야 합니다.

목자설교의 마지막 큰 주제는 ‘하나됨’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0장16절) 목자이신 예수님의 사명은 모든 양 떼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사명은 그저 이스라엘 집안의 흩어진 양들을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 (11장52절) 모두를 하나로 모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라는 약속은 마태오복음에서 부활한 자의 복음선포 명령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28장19절) 그리고 이것은 다시 사도행전에서 부활한 자의 말로 나타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장 8절)

이 사명은 단지 선교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의무를 말하면서 동시에 더 근본적인 내적 근거가 있음을 말합니다. 이 보편적 사명의 내적 근거는 바로 오직 한 착한 목자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목자이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유일한 말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흩어져 있어도 말씀을 바탕으로 그리고 말씀을 향해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돈보스코는 많은 젊은이들을 자신이 아닌 예수님께로 이끌어간 젊은이들을 위한 목자였습니다. 돈보스코의 그러한 사목은 다름 아닌 진정한 착한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보편적 사명은 우리 살레시안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 우리에게도 이 보편적 사명의 첫 번째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젊은이들을 향한 복음선포 입니다. 소비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 등을 통해 많은 젊은이들이 세상의 가치와 참 진리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신에 대한 철저한 거부를 야기 시켰습니다. 총장님에 말씀에 의하면 이는 그리스도교의 모체인 유럽교회에서 철저하게 대두된 문제라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그 결과로 교회의 노령화와 성소자 급감은 교회의 미래와 직결된 시급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유럽교회에만 국한된 일은 아닙니다.

이에 대한 첫 번째 과제는 가정 안에서의 신앙교육이라고 총장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을 모르고, 성당을 나가지 않으며,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에 빠진 젊은이들은 멀리 있거나 혹은 남의 자녀가 아닌 바로 우리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돈보스코는 상황의 요구에 따라 발도코의 오라또리오를 만드셨습니다. 오라또리오는 신앙을 위한 교회요, 착한 시민을 양성하는 학교였으며, 젊은이들이 즐겁게 뛰어 노는 운동장이었습니다. 이 오라토리오의 실현이 이제 가정 안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 보편적 사명의 두 번째 요구는 가난하고 버림 받은 청소년들에 대한 복음선포입니다. 이는 우리 수도회 카리스마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난하고 버림 받은 청소년들은 세상의 모든 유혹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고, 생계 걱정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사는 청소년 집단으로써 그들에게 신에 대한 문제는 사치로 느껴집니다.

돈보스코 시대에도 산업화의 태동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집단이 바로 젊은이들이었고 이 아이들 때문에 돈보스코는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랑 받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시 토리노에 실제로 존재했던 비행 청소년들, 문맹의 만연된 상황과 기술 및 직업을 통한 신분 상승의 세계, 실직 및 이주민 세상, 심신의 장애 등 수 많은 요소들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돈보스코의 모습 안에서 살레시오 가족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우리의 사목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고 총장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즘 우리 사업이 일차적으로 지향하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어떤 사업이 그들의 요구에 적합할까요? 오라토리오들이 우선시 했던 전형적인 살레시오 사업들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들은 우리가 과연 돈보스코의 충실한 제자들인지? 우리의 신원을 되짚어 보게 하는 질문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요한 복음 10장 7절에서 18절까지의 착한 목자 설교에 대한 성서적 고찰을 통해 네 가지의 큰 주제를 알아보았고 그 주제를 총장님께서 주신 생활지표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생활지표를 되새겨 봅니다. “돈보스코를 배우고 닮아, 청소년을 우리 삶의 사명으로 삼읍시다.” 돈보스코를 배우고 닮는 것은 우리 살레시안들의 신원과 직접적으로 연관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모델로 주어진 젊은이들의 착한 목자인 돈보스코는 유일한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그분의 양들인 젊은이들을 그분께 데려가 영원한 생명을 선사한 참으로 착한 목자였습니다.

따라서 살레시안으로써 돈보스코를 배우고 닮는 것은 결국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닮는 것이요, 그분의 양떼인 젊은이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